자 현덕(玄德) · 161년 ~ 223년 · 유주 탁군 탁현 · 한 세력의 주인
돗자리 장수에서 시작해 인의로 인재를 모아 촉한을 건국한 낭만 황제
출전 · 『삼국지』 촉서 선주전과 배송지 주의 『전략』 · 『화양국지』 · 『구주춘추』 · 『제갈량집』 · 촉서 제갈량전 · 관우전 · 장비전 · 조운전 · 법정전 · 이주비자전 · 미축전 · 유봉전 · 위서 무제기 · 여포전 · 도겸전 · 조순전 · 오서 오주전 · 주유전 · 육손전
유비는 자가 현덕이며 탁군 탁현 사람입니다. 『삼국지』 선주전은 그를 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 적고, 배송지 주에 인용된 『전략』은 본디 임읍후의 갈래라고 달리 적습니다. 일찍 아버지 유홍을 여읜 유비는 어머니와 함께 신을 팔고 돗자리를 짜서 살았습니다. 열다섯에 같은 집안의 유덕연, 요서의 공손찬과 함께 노식을 섬겼고 공손찬을 형으로 섬겼습니다. 글 읽기보다 개와 말, 음악, 좋은 옷을 즐겼으며,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에 손을 내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고 제 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말수가 적고 남에게 잘 낮추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고, 호걸과 사귀기를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따랐습니다. 중산의 큰 장사꾼 장세평 · 소쌍이 대 준 재물로 무리를 모으자 관우와 장비가 그를 지켰고, 관우전은 유비가 두 사람과 한 침상에서 자며 형제처럼 아꼈다고 적습니다.
영제 말 황건이 일어나자 유비는 무리를 이끌고 교위 추정을 따라 싸운 공으로 안희현위가 되었습니다. 공무로 온 독우가 만나 주지 않자 곧장 들어가 그를 묶어 곤장 이백 대를 치고, 인끈을 그의 목에 걸어 둔 채 벼슬을 버렸습니다. 뒤에 도적에게 깨져 중랑장 공손찬에게 몸을 맡겼고, 원소를 막으며 공을 세워 평원상이 되었습니다. 조조가 서주를 치자 도겸을 구하러 갔다가 그에게 몸을 맡겼고, 흥평 원년(194) 「유비가 아니면 이 주를 편안히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죽은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를 맡았습니다. 건안 원년(196) 원술과 맞서는 사이 여포가 하비를 빼앗고 처자를 사로잡자 여포와 화친해 소패에 머물렀으나 다시 여포에게 깨져 조조에게 달아났고, 198년에는 조조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았습니다.
조조는 그를 좌장군으로 올리고 나갈 때 수레를 함께 타고 앉을 때 자리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 무렵 헌제의 장인 동승이 천자의 옷띠 속 밀조를 받았다며 조조를 없애자고 했습니다. 조조가 넌지시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뿐이오」라고 하자 밥을 먹던 유비는 수저를 떨어뜨렸고, 배송지 주에 인용된 『화양국지』는 마침 친 천둥을 핑계로 둘러댔다고 덧붙입니다. 동승과 모의를 맺은 유비는 원술을 막으러 나간 길에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조조에게 등을 돌렸고, 건안 5년(200) 정월 모의가 드러나 동승 등은 모두 죽었습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원소와 맞선 급한 때에도 「유비는 인걸이니 지금 치지 않으면 반드시 뒷날의 걱정거리가 된다」며 몸소 왔고, 크게 진 유비는 처자와 관우를 잃고 원소에게 몸을 맡겼다가 이듬해 형주의 유표에게 달아났습니다.
유표는 교외까지 나와 상빈의 예로 맞고 그를 신야에 머물게 했으나,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모여들자 은근히 막았습니다. 박망에서는 제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는 척해 쫓아온 하후돈 등을 복병으로 깨뜨렸습니다. 서서가 제갈량을 누운 용이라 하며 몸소 찾아가라고 권하자 유비는 세 번을 가서야 그를 만났고, 제갈량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손잡았다가 천하에 변이 생기면 두 길로 나아가 한실을 일으키라는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관우 · 장비가 못마땅해하자 유비는 「내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며 달랬습니다.
건안 13년(208) 유표가 죽고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유비는 남쪽으로 물러났습니다. 따르는 무리가 십여만, 짐수레가 수천 량이라 하루에 십여 리밖에 못 가자 서둘러 강릉을 지키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유비는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데 어찌 차마 버리고 가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조조의 기병 오천이 하루 밤낮에 삼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자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고, 장비는 다리를 끊고 뒤를 막았으며 조운은 어린 후주를 안고 감부인을 지켰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고 주유 · 정보의 수군과 힘을 합쳐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깨뜨렸습니다. 이어 남쪽 네 군의 항복을 받고 형주목이 되어 공안에 자리 잡았으며, 손권은 그를 두려워해 누이를 보냈습니다.
건안 16년(211) 익주목 유장이 장송의 권유로 그를 불러들이자 유비는 형주를 제갈량 · 관우에게 맡기고 익주로 들어갔습니다. 이듬해 장송의 속셈이 드러나 유장과 원수가 되자 부를 차지하고 낙성을 한 해 가까이 에워쌌으며, 건안 19년(214) 성도를 수십 일 에워싸 유장의 항복을 받고 익주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장이 쓰던 이들은 물론 예전에 자신을 꺼리던 유파까지 높은 자리에 앉혀 재능을 다하게 했습니다. 건안 24년(219) 봄 정군산에 진을 친 유비는 황충을 시켜 하후연을 베었고, 몸소 온 조조와는 험한 곳을 지키며 끝내 맞붙지 않아 조조가 물러나자 한중을 차지했습니다. 그해 가을 마초를 비롯한 신하 백스무 명이 헌제에게 표를 올려 그를 한중왕으로 삼았으나, 곧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았습니다.
건안 25년(220) 조비가 황제를 일컫자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유비는 상을 치르고 효민황제라는 시호를 올렸습니다. 신하들이 여러 조짐과 양양에서 바친 옥새를 들어 권하자 유비는 장무 원년(221) 4월 성도에서 황제에 올랐고, 제갈량을 승상으로, 아들 유선을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6월 장비가 부하에게 죽었고, 손권이 관우를 친 것에 노한 유비는 여러 신하의 간언을 듣지 않고 7월 오를 치러 나섰습니다. 이듬해 여름 효정에서 육손에게 크게 졌는데, 육손전은 군사마다 띠풀 한 줌씩 들려 불로 진채를 깨뜨렸다고 적습니다. 어복으로 물러나 그 이름을 영안으로 고친 유비는 백제에 머물며 손권의 화친을 받아들였습니다. 장무 3년(223)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서 온 제갈량에게 뒷일을 맡기고 상서령 이엄을 버금으로 삼았는데, 제갈량전은 그가 제갈량의 재주를 조비의 열 배라 하며 「아들이 도울 만하면 돕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시오」라고 했다고 적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제갈량집』의 유조에는 처음엔 설사였다가 다른 병이 겹쳤다는 말이 있고, 그해 4월 영안궁에서 예순셋으로 죽어 시호를 소열황제라 했습니다.
진수는 유비가 넓고 굳세며 너그럽고 두터워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를 대접했으니 고조의 풍모와 영웅의 그릇이 있었고,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아들을 맡기면서 마음에 두 뜻이 없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지극한 공정함이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임기응변의 재주와 계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해 터전 또한 좁았으나, 꺾여도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서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先主之弘毅寬厚,知人待士,蓋有高祖之風,英雄之器焉及其舉國託孤於諸葛亮,而心神無貳,誠君臣之至公,古今之盛軌也『삼국연의』 제1~85회
연의에서 유비는 제1회에 처음 나옵니다. 유언이 의병을 모으는 방문을 보고 한숨짓는 스물여덟 살의 사내로, 귀가 어깨까지 드리우고 두 손이 무릎을 지나며 제 귀를 볼 수 있는 중산정왕의 후손이라 소개됩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짚신을 팔고 돗자리를 짜서 살았고, 정현과 노식을 스승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장비 · 관우를 만나 장비의 집 뒤 복숭아밭에서 검은 소와 흰 말로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같은 날 죽기를 바란다고 맹세해 맏형이 되고, 쌍고검을 벼립니다. 제2회에서는 뇌물을 바라며 그를 몰아세운 독우를 장비가 버드나무 가지로 매질하자 유비가 말리고, 인끈을 독우의 목에 걸어 둔 채 벼슬을 버립니다. 제5회 호로관에서는 관우 · 장비와 함께 여포를 에워싸 싸웁니다.
제11회와 제12회에서 도겸이 거듭 서주를 넘기려 해도 사양하다가 도겸이 죽은 뒤에야 서주를 맡고, 제14회에서 술을 끊겠다던 장비가 취한 틈에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깁니다. 제19회 백문루에서 사로잡힌 여포는 정원과 동탁의 일을 일깨운 유비를 두고 「이 녀석이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외칩니다. 제20회에서 헌제는 족보를 살펴 그를 숙부로 대하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유황숙이라 부릅니다. 제21회에서는 뒤뜰에 채소를 가꾸며 뜻을 숨기다가, 조조가 차린 푸른 매실과 데운 술 앞에서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뿐」이라는 말에 수저를 떨어뜨리고 마침 친 천둥을 핑계로 둘러대 의심을 풉니다.
제34회에서는 유표의 자리에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것을 보고 울고, 쫓기다 적로를 몰아 단계를 한 번에 세 길 뛰어 건넙니다. 제36회에서 떠나는 서서가 말을 돌려 제갈량을 천거하고, 제37회와 제38회에서 두 번의 헛걸음 끝에 세 번째로 융중의 초가를 찾아 제갈량을 얻습니다. 제39회에서 관우 · 장비가 제갈량을 스승으로 대하는 그를 못마땅해하자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고 달래고, 박망파에서 제갈량이 처음 군사를 부려 하후돈의 군사를 불로 깨뜨립니다. 제41회에서는 따르는 군민 십여만을 버리자는 말에 울며 「큰일을 하려면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제42회에서는 조운이 장판에서 품고 나온 아두를 받아 이 아이 때문에 대장을 잃을 뻔했다며 땅에 던집니다.
제54회와 제55회에서 주유의 꾀로 오에 건너가 손부인과 혼인하고 부인과 함께 형주로 빠져나오며, 제63회 낙봉파에서 방통을 잃고 제65회에서 유장의 항복을 받아 스스로 익주목이 됩니다. 제73회에서 제위를 권하는 제갈량에게 한의 신하라며 물리치다 한중왕에 오르고, 제80회에서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말에 통곡한 뒤 병을 핑계로 누운 제갈량에게 떠밀려 황제에 오릅니다. 제81회에서 조운과 제갈량의 간언을 물리치고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나서지만 출진을 앞두고 장비마저 부하 범강 · 장달에게 잃고, 제83회와 제84회에서 칠백 리에 이어 세운 진채가 육손의 불에 무너져 백제성으로 달아납니다. 제85회에서 영안궁에 누워 관우 · 장비의 넋을 본 뒤 제갈량의 손을 잡고 아들이 도울 만하면 돕고 재주가 없으면 그대가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라고 이르며, 조운에게도 아들을 부탁하고 예순셋으로 숨을 거둡니다. 연의에서 유비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유홍 · 아내 감부인 · 미부인 · 손부인 · 오황후 · 아들 유선 · 유영 · 유리 · 양자 유봉 · 딸 둘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인의를 아는 이는 따르시오.
나는 돗자리를 짜던 사람이오. 그래서 아오.
인의를 말하는 데 무슨 채비가 필요하겠소.
장판에서도 백성을 두고 가지는 않았소.
…아우들의 얼굴이 스치는구려.
천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 되는 것이오.
백제성의 밤이 이러하였겠구려.
사람이 모이면 이렇게 되오.
…내 덕이 모자란 탓이오.
승상… 아두를 부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