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공조(恭祖) · 132년 ~ 194년 · 양주 단양군 단양현 · 한 세력의 주인
조조의 침공에 시달리다 죽으며 서주를 유비에게 맡기라 한 서주목
출전 · 『삼국지』 위서 도겸전과 배송지 주의 『오서』 · 무제기와 배송지 주의 『세어』 · 『오서』 · 선주전 · 진등전 주의 『선현행장』 · 오서 손책전 · 여범전 · 『후한서』 도겸전 · 주준전
도겸은 자가 공조이며 단양군 단양현 사람입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서』에 따르면 아버지는 여요현의 장을 지냈고, 도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을에서 얽매이지 않는 아이로 알려졌습니다. 열네 살에도 비단을 이어 깃발을 만들고 대말을 타고 놀아 고을 아이들이 모두 그를 따랐는데, 길에서 그를 본 같은 고을의 전 창오태수 감공이 생김새를 기이하게 여겨 이야기를 나눈 뒤 딸을 주기로 했습니다. 부인이 놀기만 하는 아이에게 어찌 딸을 주느냐고 성내자 감공은 「생김새가 남다르니 자라면 반드시 크게 될 것」이라 답했습니다.
도겸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해 유생이 되었고 주와 군에서 벼슬하다 무재로 천거되어 노현의 영이 되었습니다. 『오서』는 그가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큰 절개가 있었다고 적고, 서현의 영으로 있을 때 아버지의 벗이자 같은 군의 선배인 태수 장반에게 굽히기를 부끄러워했다고 전합니다. 장반이 술자리에서 억지로 춤을 청하자 춤을 추면서도 몸을 돌리지 않았고, 까닭을 묻자 「돌면 남을 이기게 된다」고 답해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그 뒤 유주자사를 거쳐 의랑이 되었고, 중평 2년(185) 거기장군 장온의 군사에 참여해 서쪽으로 한수를 쳤습니다. 『후한서』는 장온의 사마로서 변장을 쳤다고 적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그 앞서 서강이 변경을 노략할 때 정서장군 황보숭의 청으로 양무도위가 되어 함께 강족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또 장온을 가볍게 여겨 여러 벼슬아치가 모인 술자리에서 그를 욕보였다가 변방으로 쫓겨났는데, 사람들의 권유로 다시 불려 와서도 「나는 조정에 사죄하는 것이지 그대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장온은 「공조의 미친 병이 아직 낫지 않았느냐」며 술자리를 베풀어 처음처럼 대했다고 합니다.
서주에 황건이 일어나자 도겸은 서주자사가 되어 황건을 쳐서 크게 깨뜨렸고, 『후한서』는 이로써 경내가 편안해졌다고 적습니다. 동탁의 난 뒤 천자가 장안에 있어 사방의 길이 끊기자 도겸은 샛길로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고, 이로써 안동장군 · 서주목이 되고 율양후에 봉해졌습니다. 『후한서』 주준전에 따르면 그는 동탁과 맞선 주준에게 정병 3천을 보냈고, 동탁이 죽은 뒤 이각 · 곽사가 장안을 어지럽히자 여러 호걸과 함께 주준을 태사로 받들어 천자를 맞자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때 서주는 백성이 많고 곡식이 넉넉해 떠돌던 백성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선현행장』에 따르면 세상이 거칠고 백성이 굶주리자 도겸은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았고, 진등은 물길을 내어 벼를 넉넉히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진수는 도겸이 도리를 등지고 제 뜻대로 했다고 적습니다. 서주의 이름난 선비 조욱은 충직한 탓에 멀어져 광릉태수로 나갔고, 남을 헐뜯는 소인 조굉 등을 가까이 믿어 형벌과 정사가 어그러지고 착한 이들이 해를 입어 서주가 점점 어지러워졌습니다. 『후한서』는 같은 군 사람 착융에게 광릉 · 하비 · 팽성의 군량 운반을 맡겼더니 착융이 세 군의 물자를 가로채 큰 절을 세웠다고 적습니다. 하비의 궐선이 천자를 자칭하자 도겸은 처음에 그와 손잡았다가 뒤에 그를 죽이고 무리를 아울렀습니다. 그 무렵 원술 · 공손찬과 손잡고 발간에 진을 쳐 원소를 압박하다 조조와 원소에게 깨지기도 했습니다. 『삼국지』 손책전은 서주목 도겸이 강도에 머물던 손책을 깊이 꺼려 손책이 어머니를 곡아로 옮겼다고 적고, 여범전은 도겸이 손책을 따르던 여범을 원술의 첩자로 여겨 고문하게 했다고 적습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난을 피해 낭야에 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는데, 이 일은 기록이 갈립니다. 『후한서』는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키다 그 군사들이 조숭의 재물을 탐해 습격해 죽였다 하고, 배송지 주에 인용된 『세어』는 도겸이 몰래 기병 수천을 보내 사로잡게 했다 하며, 『오서』는 도겸이 붙인 도위 장개가 기병 2백으로 호송하다 태산의 화 · 비 사이에서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회남으로 달아났다고 적습니다. 초평 4년(193) 조조가 쳐들어와 열 몇 성을 떨어뜨리고 팽성에서 크게 싸우자 도겸의 군은 져서 만 명 넘게 죽었고 사수가 그 때문에 흐르지 못했습니다. 도겸은 담으로 물러나 지켰고 조조는 양식이 모자라 돌아갔습니다. 『후한서』는 조조가 돌아가며 세 고을을 도륙해 남녀 수십만 명을 죽이고 닭과 개도 남기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삼국지』 선주전에 따르면 도겸은 청주자사 전해에게 사자를 보내 위급함을 알렸고, 전해와 유비가 함께 구하러 왔습니다. 도겸은 단양병 4천을 유비에게 더해 주고 그를 예주자사로 천거해 소패에 머물게 했습니다. 흥평 원년(194) 조조가 다시 쳐들어와 낭야 · 동해의 여러 현을 빼앗자 도겸은 두려워 단양으로 달아나려 했는데, 마침 장막이 배반해 여포를 맞아들이자 조조는 군을 돌렸습니다. 그해 도겸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병이 깊어지자 별가 미축에게 「유비가 아니면 이 주를 편안히 할 수 없다」고 일렀고, 도겸이 죽자 미축이 주의 사람들을 이끌고 유비를 맞았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도겸은 예순셋에 죽었고 장소 등이 그를 기리는 애사를 지었으며, 두 아들 도상과 도응은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진수는 「도겸은 어지러워 근심 속에 죽었다」고 평했고, 범엽은 「서주가 다하고 쇠잔해진 것은 실로 도겸이 화근이었다」고 적었습니다.
陶謙昏亂而憂死徐方殲耗,實謙為梗『삼국연의』 제5회 · 제10~12회
연의에서 도겸은 제5회에 동탁을 치는 제후의 제12진인 서주자사로 처음 나오고, 호뢰관으로 가는 여덟 갈래 제후에 듭니다. 제10회에서 연의는 그를 사람됨이 온후하고 순박한 서주태수로 소개합니다. 조조와 사귀고 싶던 도겸은 낭야에서 연주로 가던 조숭 일행이 지나가자 경계 밖까지 나가 맞아 이틀 동안 잔치를 베풀고, 도위 장개에게 군사 5백을 주어 호송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래 황건의 잔당이던 장개는 화 · 비 사이의 낡은 절에서 비를 피하던 밤에 조숭의 온 집안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회남으로 달아납니다. 「도겸이 군사를 놓아 내 아비를 죽였다」며 쳐들어온 조조가 백성을 죽이고 무덤을 파헤치자, 도겸은 하늘을 우러러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서주의 백성이 이런 난을 당한다」며 통곡합니다. 진 앞에 나가 장개의 짓이지 자기 탓이 아니라고 밝혀도 조조가 꾸짖기만 하자, 스스로 몸을 묶고 조조의 진영에 가서 백성의 목숨을 구하려 합니다.
제11회에서 도겸은 미축의 꾀로 북해의 공융과 청주의 전해에게 구원을 청하고, 유비가 오자 그의 의젓한 풍모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미축에게 서주의 패인을 가져오게 해 넘기려 합니다. 여포가 연주를 쳐서 조조가 물러가자 잔치 자리에서 다시 서주를 넘기려 하고, 「그대가 나를 버리고 가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울며 붙잡아 유비를 소패에 머물게 합니다. 제12회에서 예순셋의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유비를 침소로 불러 세 번째로 서주의 패인을 맡기며, 두 아들 도상과 도응은 재주가 모자라니 주의 일을 맡기지 말라 하고 손건을 보좌로 천거한 뒤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숨을 거둡니다. 연의에서 도겸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여요현의 장) · 장인 감공 · 아들 도상 · 도응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서주를 지키려 하오.
서주는 인심으로 다스리는 땅이오.
늙은이라고 물러설 줄만 아는 것은 아니오.
…서주 백성들이 눈에 밟히는구려.
덕으로 버텨 보겠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있소.
이래서 서주를 현덕에게 맡겼소.
서주는 아직 무사하오.
…현덕에게 맡길 때인가.
서주는 현덕에게 맡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