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미상 · 미상 ~ 220년 무렵 · 미상 · 유비 휘하
관우를 구하지 않아 아버지의 손에 죽은 유비의 양자
출전 · 『삼국지』 촉서 유봉전과 배송지 주의 『위략』 · 선주전 · 비시전 · 요립전 · 위서 임성왕전 배송지 주의 『위략』 · 하후상전 · 서황전
유봉은 본래 나후 구씨의 아들로, 장사 유씨의 생질입니다. 형주에 온 유비는 아직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를 길러 아들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가맹에서 돌아서 유장을 칠 무렵(212) 유봉은 나이 스물 남짓으로 무예가 있고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군사를 거느리고 제갈량 · 장비 등과 함께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 이르는 곳마다 싸워 이겼습니다. 익주가 평정되자(214) 부군중랑장이 되었습니다.
건안 24년(219) 한중에서 유비와 조조가 맞설 때, 『삼국지』 임성왕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은 유비가 산 위에 머물며 유봉을 내려보내 싸움을 걸게 하자 조조가 「짚신 팔던 놈이 늘 양아들을 시켜 이 몸을 막게 하는구나. 우리 누런 수염을 불러 치게 하리라」 하고 욕하며 아들 조창을 불렀다고 적습니다.
앞서 유장은 부풍 사람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딸려 각각 군사 2천을 이끌고 유비를 맞게 했는데, 유비는 맹달에게 두 군사를 아울러 거느리고 강릉에 머물게 했고 촉이 평정된 뒤 의도태수로 삼았습니다. 같은 해(219) 유비는 맹달에게 자귀에서 북쪽으로 방릉을 치게 했고 방릉태수 괴기는 맹달의 군사에게 죽었습니다. 맹달이 상용으로 나아가려 하자, 유비는 맹달 혼자 맡기 어려울까 속으로 걱정해 유봉을 한중에서 면수를 따라 내려보내 맹달의 군사를 거느리게 했고 두 사람은 상용에서 만났습니다. 상용태수 신탐이 무리를 들어 항복하고 처자와 일족을 성도로 보내자, 유비는 신탐을 정북장군으로 삼아 그대로 상용태수를 맡기고 아우 신의를 건신장군 · 서성태수로 삼았으며, 유봉을 부군장군으로 올렸습니다.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에워싼 뒤로 유봉과 맹달을 거듭 불러 군사를 내어 자신을 돕게 했으나, 두 사람은 산간의 군들이 이제 막 붙어 흔들 수 없다며 관우의 명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관우가 패하자 유비는 이를 한스러워했습니다. 또 유봉은 맹달과 성을 내며 다투어 화합하지 못하다가 곧 맹달의 고취(군악대)를 빼앗았습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데다 유봉에게 분노한 맹달은 이듬해(220) 유비에게 작별의 표를 올리고 거느린 무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습니다. 요립은 뒷날 상용이 무너져 한 지방을 헛되이 잃었다고 꼬집었습니다.
조비는 맹달을 신성태수로 삼고, 정남장군 하후상과 우장군 서황을 보내 맹달과 함께 유봉을 치게 했습니다. 맹달은 유봉에게 글을 보내 「그대와 한중왕은 길 가던 사람일 뿐이오. 피붙이도 아니면서 권세를 쥐고 군신의 의리도 아니면서 윗자리에 있소. 아두가 태자가 된 뒤로 뜻있는 이들이 그대를 두고 마음을 졸이고 있소」라며, 화란은 늘 태자를 폐하고 세우는 사이에서 일어나니 화가 이르기 전에 위로 와서 나후의 뒤를 이으면 큰 고을의 첫 제후가 되리라고 권했습니다. 유봉은 맹달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의가 유봉을 배반하자 유봉은 패해 성도로 달아났고, 신탐도 위에 항복했습니다. 유봉이 돌아오자 유비는 그가 맹달을 업신여기고 괴롭힌 일과 관우를 구하지 않은 일을 꾸짖었습니다. 제갈량은 유봉이 굳세고 사나워 대가 바뀐 뒤에는 끝내 다루기 어려우리라 걱정해, 이 기회에 없애라고 유비에게 권했습니다. 유비는 유봉에게 죽음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고, 유봉은 「맹자도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했습니다. 맹자도는 맹달입니다. 유비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문에는 죽은 해가 없으나, 맹달의 편지가 조비가 선양을 받은 220년 10월 뒤의 것이어서 그해 끝이나 이듬해 초로 보입니다.
배송지 주에 따르면 유봉의 아들 유림은 아문장이 되었다가 함희 원년(264) 하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삼국지』 비시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뒷날 맹달을 꾀어 들이려 보낸 글에서 「이는 실로 유봉이 그대를 업신여겨 선주가 선비를 대하는 뜻을 다치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수는 평에서 「유봉은 의심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만큼 대비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劉封處嫌疑之地,而思防不足以自衛封歎曰:「恨不用孟子度之言!」先主為之流涕『삼국연의』 제36회 · 제39~41회 · 제49회 · 제52회 · 제57회 · 제60~63회 · 제65회 · 제70~73회 · 제76~77회 · 제79회
연의에서 유봉은 제36회에 처음 나옵니다. 조인을 물리치고 번성에 든 유비는 한나라 종친인 번성 현령 유필의 집에서 그의 생질 구봉을 보는데, 본디 나후 구씨의 아들로 부모를 여의고 외숙에게 몸을 맡긴 젊은이입니다. 유비가 그의 헌칠한 기상을 아껴 양아들로 삼고 이름을 유봉으로 고치자, 관우는 「형님은 이미 아들이 있는데 어찌 남의 자식을 들이시오. 뒷날 반드시 난이 생길 것」이라며 언짢아합니다.
유봉은 제39~40회 박망파와 신야의 싸움에서 관평과 함께 불을 놓거나 달아나는 조인을 치고, 제49회 적벽 싸움에서는 배를 몰아 달아나는 조조군을 거두며, 제57회에서는 관평과 함께 파구에서 주유의 물길을 막습니다. 익주를 칠 때는 제61회 부성의 잔치에서 위연이 칼춤을 추며 눈짓하자 함께 칼을 뽑아 춤을 거들고, 제62회에서 관평과 함께 칼을 품고 온 양회 · 고패를 하나씩 붙잡습니다. 제72회 한중에서는 조조가 「짚신 팔던 놈이 늘 양아들을 시켜 맞서게 한다」고 욕하자 성이 나 창을 꼬나 들고 달려들고, 조창과 맞붙어서는 세 합 만에 크게 집니다. 제73회에서 맹달 · 왕평 등과 상용의 여러 군을 치자 신탐 등이 항복합니다.
제76회에서 맥성에 갇힌 관우가 요화를 보내 구원을 청하자, 유봉은 숙부를 두고 볼 수 없다며 구하려 합니다. 그러나 맹달이 「관우는 그대를 조카로 여기지 않소. 한중왕이 뒤를 세울 때 관우가 그대를 남의 자식이라 물리치고 산성으로 멀리 보내게 했소」라고 부추기자, 산성이 새로 붙어 군사를 나눌 수 없다며 요화를 돌려보냅니다.
제79회에서 제갈량의 뜻에 따라 면죽을 지키러 옮겨 갔던 유봉은 위로 달아난 맹달을 치러 나서고, 맹달이 보낸 항복 권유의 글을 찢고 심부름꾼을 벱니다. 그러나 하후상 · 서황의 복병에 크게 지고, 돌아가 보니 상용의 신탐과 방릉의 신의마저 위에 항복해 있어 백여 기만 이끌고 성도로 달아납니다. 유비가 무슨 낯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고 꾸짖자 유봉은 맹달이 말려서 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유비는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면서 흙인형이 아니라면 어찌 참소하는 도적의 말을 듣느냐며 끌어내 베게 합니다. 뒤에 유봉이 맹달의 글을 찢고 심부름꾼을 벤 일을 들은 유비는 속으로 몹시 뉘우칩니다. 연의에서 유봉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생부 나후 구씨 · 양아버지 유비 · 아들 유림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부군장군 유봉이오.
양자라는 말이 늘 따라다녔소.
성을 얻은 것도 내 손이었소.
…상용은 그때 막 얻은 참이었소.
그 청을 물리친 일은 평생 남았소.
이름이 아니라 손으로 보이겠소.
이번에도 늦었구려.
강을 거슬러 성을 얻던 손이오.
지킬 자리를 잃었소.
아버지, 늦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