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운장(雲長) · 미상 ~ 219년 · 유비 휘하
굳건한 충의와 만인을 대적하는 용맹으로 천하를 진동시킨 촉한의 무신(武神)
관우는 중국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촉한의 명장입니다. 고향 하동군 해현을 떠나 탁군으로 이주했을 때 유비, 장비와 만나 형제와 같은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평생 유비를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초기에는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험난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패배해 흩어졌을 때 관우는 조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조는 관우의 굳센 성품과 재능을 아껴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으나, 관우는 '조조의 은혜는 감사하지만 유비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공을 세운 뒤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후 백마 전투에서 원소군의 맹장 안량을 단숨에 베어 조조에게 은혜를 갚은 뒤, 미련 없이 모든 하사품을 그대로 둔 채 유비에게 돌아간 일화는 그의 굳건한 충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적벽대전 승리 이후, 유비가 익주(촉)를 평정하러 떠나자 관우는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의 수비를 홀로 도맡았습니다. 형주 총독으로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군과 대치했으며, 219년에는 번성을 공격해 조조군의 명장 우금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하는 등 천하에 용맹을 떨쳤습니다. 관우의 엄청난 기세에 놀란 조조가 진지하게 수도 이전을 고민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관우의 지나친 자부심과 외교적 실책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동맹국이었던 손권(오나라) 측을 무시하여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를 노린 손권은 조조와 밀약을 맺은 뒤 여몽을 시켜 관우의 배후를 기습했습니다. 번성 공격에 전력을 쏟느라 형주 수비에 허점을 보인 관우는 부하 미방과 사인 등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결국 고립되었습니다. 맥성으로 몸을 피한 뒤 탈출을 시도했으나, 오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혀 장남 관평과 함께 참수당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만 명을 대적할 만한 호랑이 같은 맹장'이라 높이 평가하면서도, 성격이 너무 굳세고 오만하여 패망했다고 냉정하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의 흔들림 없는 충의와 용맹함은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역대 왕조를 거치며 신격화되어 오늘날까지도 '무신(전쟁의 신)'으로 숭배받고 있습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영웅적인 면모가 더욱 극적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유비, 장비와 맺은 '도원결의'를 통해 의형제가 되었으며, 키가 9척(약 2m)에 달하고 붉은 대추 빛 얼굴에 긴 수염을 가진 '미염공(美髯公)'으로 묘사됩니다. 그가 82근(약 18kg)의 청룡언월도를 휘두르고 적토마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연의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조조에게서 다섯 관문을 뚫고 여섯 장수를 베며 유비에게 돌아갔다는 '오관참육장', 적벽대전 후 화용도에서 조조를 옛 정을 생각하여 살려주었다는 일화, 화타가 뼈를 긁어내며 맹독을 치료할 때 태연하게 고기를 먹고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 등은 관우의 초인적인 무용과 의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추가된 픽션입니다. 사후에는 여몽에게 혼령으로 나타나 그를 피 토하고 죽게 만들거나 조조의 꿈에 나타나는 등 신적인 존재로 다루어졌습니다.
장남 관평, 차남 관흥 / 손자 관통, 관이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제 열전에서 한 자락씩 따 왔습니다.
관운장이 여기 있다!
도원에서 맺은 의를 걸고 말하겠소.
이 붉은 얼굴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소.
뼈를 긁는 동안에도 바둑을 두었소.
형주를 잃던 날의 바람이 부는구려.
의로운 말 앞에 굽지 않을 자는 없소.
…맥성의 길이 이러하였던가.
의로운 군세를 누가 막겠는가.
…의로도 못 막는 것이 있구나.
…맥성의 달이 차갑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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