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국양(國讓) · 미상 ~ 미상 (254년 이전) · 유주 어양군 옹노현 · 조조 휘하
늙은 어머니 때문에 유비를 떠났다가 위의 북쪽 변경을 지킨 청렴한 장수
출전 · 『삼국지』 위서 전예전과 배송지 주의 『위략』 · 견초전 · 임성위왕전 · 서막전 · 오서 오주전 · 촉서 선주전
전예는 자가 국양이며 어양군 옹노현 사람입니다. 유비가 공손찬에게 몸을 맡겼을 때 나이 어린 전예가 스스로 유비를 따랐고, 유비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자 전예는 어머니가 늙었다며 돌아가기를 청했고,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그대와 함께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며 헤어졌습니다.
공손찬은 그에게 동주현령을 맡겼습니다. 공손찬의 장수 왕문이 배반해 원소의 군사 1만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두려워 항복하려 했습니다. 전예는 성에 올라 공손씨에게 두터운 대접을 받고도 떠났다가 이제 돌아와 도적이 되니 어지러운 사람임을 알겠다고 꾸짖고, 「나는 이미 이 성을 맡았으니 어서 치지 않고 무엇 하느냐」고 했습니다. 왕문은 부끄러워 물러났습니다. 공손찬은 그에게 꾀가 있음을 알면서도 맡기지 못했습니다. 공손찬이 패하자 태수의 일을 보던 선우보가 평소 그와 사이가 좋아 장사로 삼았는데, 선우보가 누구를 따를지 모르자 전예는 「끝내 천하를 평정할 이는 반드시 조씨이니 어서 귀순하시라」고 권했고, 선우보는 이를 따라 봉작을 받았습니다.
조조는 그를 불러 승상군모연으로 삼았고, 영음 · 낭릉의 현령을 거쳐 익양태수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렸습니다. 건안 23년(218) 조조의 아들 조창이 대군의 오환을 칠 때 그의 상이 되었습니다. 역수 북쪽에서 오랑캐의 기병이 숨어 있다가 덮쳐 군이 어지러워지자, 전예는 지형을 따라 수레를 돌려 둥근 진을 치고 안에서 활과 쇠뇌를 당겨 두고 빈틈을 의병으로 메웠습니다. 호족이 나아가지 못하고 흩어지자 뒤쫓아 크게 깨뜨리고 대군을 평정했으니, 모두 전예의 꾀였습니다. 남양태수로 옮겨서는 앞 태수가 사형에 처하자고 올려 둔 도적 후음의 무리 5백여 명을 하나하나 만나 달래고 한꺼번에 형틀을 풀어 보냈습니다. 죄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서로 일러 도적 떼가 하루아침에 흩어지니, 조조가 이를 좋게 여겼습니다.
조비 초에 북쪽 오랑캐가 강성해 변경을 어지럽히자 전예는 지절 호오환교위가 되어 견초 · 해준과 함께 선비를 거느렸습니다. 선비의 가비능 · 미가 · 소리가 땅을 나누어 거느리며 중국에 말을 팔지 않기로 맹세하자, 그는 오랑캐가 하나로 뭉치는 것은 중국에 이롭지 않다 하여 먼저 그들을 갈라 서로 치게 했습니다. 맹세를 어기고 말을 관에 낸 소리가 가비능에게 공격받아 구원을 청하자 날랜 군사만 이끌고 깊이 들어갔고, 오랑캐가 돌아갈 길을 끊자 쇠똥과 말똥을 모아 불을 피워 둔 채 다른 길로 빠져나왔습니다. 마성에서 열 겹으로 에워싸이자 사마에게 깃발과 북을 벌여 남문으로 나가게 해 오랑캐의 눈을 끌고, 자신은 정예를 이끌고 북문으로 나와 두 쪽에서 쳐서 크게 깨뜨렸습니다. 오환의 왕 골진이 사납고 공손하지 않자 휘하 백여 기만 이끌고 그 부락에 들어가, 나와 절하는 골진을 베고 죄를 밝힌 뒤 그 아우로 대신하게 하니 위엄이 사막에 떨쳤습니다. 산적 고애를 선비의 소리 부락이 베게 한 공으로 장락정후에 봉해졌고, 교위로 아홉 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주자사 왕웅의 무리가 그가 변경을 어지럽힌다고 헐뜯어 여남태수로 옮겨졌습니다. 견초전은 태화 2년(228) 변경을 나간 전예가 마읍 옛 성에서 가비능에게 에워싸이자 안문태수 견초가 구하러 나섰다고 적습니다.
태화 말에 공손연이 요동에서 등을 돌리자 전예는 청주의 여러 군을 감독하며 토벌에 나섰습니다. 마침 오가 공손연과 손을 잡았는데, 명제가 적이 많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며 군사를 물리라 하자, 전예는 해가 저물어 바람이 거세니 돌아가는 오의 배가 동쪽에 기댈 기슭이 없어 반드시 성산으로 오리라 헤아렸습니다. 그는 바다를 따라 섬과 험한 길목을 살펴 군사를 벌여 지켰고, 오의 배는 과연 거센 바람에 산에 부딪쳐 가라앉아 기슭으로 밀려온 무리가 모두 사로잡혔습니다. 오주전은 가화 원년(232) 9월 위의 장수 전예가 요동에 갔던 주하를 성산에서 베었다고 적습니다. 그러나 그를 못마땅해하던 청주자사 정희가 전예가 얻은 구슬과 금을 관에 들이지 않았다고 몰래 아뢰어 그 공은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뒤에 손권이 10만을 일컫는 무리로 합비 신성을 치자 정동장군 만총이 여러 군을 이끌고 구하려 했습니다. 전예는 적이 신성을 볼모로 우리 대군을 끌어내려는 것이니 성을 치게 두어 기세를 꺾고, 성이 떨어지지 않아 무리가 지쳤을 때 치면 크게 이길 수 있다고 아뢰었고, 천자가 이를 따랐는데 마침 적이 달아났습니다. 정시 초에 호흉노중랑장 · 병주자사가 되자 바깥 오랑캐가 그 위엄을 듣고 와서 바쳤습니다. 위위로 불려 와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사마의가 허락하지 않자, 「나이 일흔이 넘어 벼슬에 있는 것은 종이 울리고 물시계가 다했는데도 밤길을 멈추지 않는 것과 같으니 죄인입니다」라고 답하고 병을 내세웠습니다. 태중대부가 되어 경의 녹을 받았고, 여든두 살에 죽었으며 아들 전팽조가 이었습니다.
전예는 깨끗하고 검소하여 상으로 받은 것은 모두 장병에게 나누었고, 오랑캐가 사사로이 보낸 것은 모두 장부에 적어 관에 들였으므로 집은 늘 가난했습니다. 다른 겨레도 모두 그의 절개를 높였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선비의 소리 등이 몰래 금 30근을 품고 와서 주자 그는 소매를 벌려 받고는 그들이 떠난 뒤 모두 관에 넘겼고, 명제가 조서로 기리며 비단 5백 필을 내리자 그 반을 두었다가 오랑캐가 다시 오자 나누어 주었습니다. 『위략』은 또 그가 죽을 때 「나를 반드시 서문표 곁에 묻으라」 했고 여남 사람들이 초상을 그리고 비를 세웠다고 적습니다. 가평 6년(254) 조정은 맑은 신하를 기리는 조서에서 서막 · 호질과 함께 옛 위위 전예를 들어 죽은 뒤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다며 그 집에 곡식과 돈을 내렸습니다. 진수는 「전예는 몸가짐이 깨끗하고 계략이 밝고 익숙했다」고 평하면서도 그가 작은 주에 그쳐 쓰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田豫居身清白,規畧明練年過七十而以居位,譬猶鍾鳴漏盡而夜行不休,是罪人也『삼국연의』 제103회
연의에서 전예의 이름은 제103회에 한 번 나옵니다. 제갈량이 기산과 위수 남쪽에서 사마의와 맞서던 때 손권이 촉과 약속하고 세 길로 위를 치자, 조예도 세 길로 군사를 내어 맞섭니다. 유소에게 강하를, 전예에게 양양을 구하게 하고, 조예 자신은 만총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구하러 갑니다. 만총이 소호 어귀의 오군 수채를 밤에 불살라 군량과 기구를 태우고, 육손이 손권에게 올린 글이 위군에게 잡혀 계책이 새자 오군은 공 없이 물러납니다. 연의는 젊은 날 유비를 따랐다가 어머니 때문에 떠난 일, 북쪽 변경에서 오환과 선비를 다스린 일, 성산에서 오의 배를 사로잡은 일은 옮기지 않았습니다. 연의에서 전예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전팽조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북방은 내가 안다.
전국양이오. 북방의 일이라면 물어보시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소.
…이민족보다 어렵구려.
여기서 밀릴 수는 없소.
북쪽을 다스린 것은 힘이 아니라 셈이오.
…내 몫이 여기까지인가.
북방은 오늘도 조용하다.
…바람이 거칠구나.
북방은… 이제 조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