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태초(太初) · 209년 ~ 254년 · 예주 패국 초현 · 조조 휘하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형장에 선 정시의 명사
출전 · 『삼국지』 위서 하후상전에 붙은 하후현전과 배송지 주의 『세어』 · 『위략』 · 『위서』 · 『위씨춘추』 · 『한진춘추』 · 위서 삼소제기 · 제갈탄전 주의 『세어』 · 부하전 주의 『부자』 · 곽회전 · 『진서』 경제기 · 문제기 · 후비전 · 『세설신어』 용지편 · 문학편 주
하후현은 자가 태초이며 정남대장군 하후상의 아들입니다. 집안은 패국 초현의 하후씨이고, 어머니 덕양향주 조씨가 조진의 누이여서 하후현은 조상의 외사촌이었습니다. 누이 하후휘는 사마사의 아내가 되었는데, 『진서』 후비전은 그녀가 위 왕실의 외손이라 사마사가 몹시 꺼렸고 청룡 2년(234) 독으로 죽었다고 적습니다. 황초 6년(225) 아버지 하후상이 죽자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하후현은 젊어서 이름이 났고 스무 살 무렵 산기황문시랑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명제를 뵈러 들어가 황후의 아우 모증과 나란히 앉게 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고, 명제는 그를 미워해 우림감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세설신어』는 이때 사람들이 「갈대가 옥나무에 기댄 꼴」이라 했다고 전하고, 사람들이 하후현을 해와 달이 품에 드는 듯 환하다고 일컬었다고 적습니다. 『세어』에 따르면 그 무렵 하후현 · 제갈탄 · 등양 등은 서로 이름을 매겨 하후현 등 넷을 「사총」, 제갈탄 등 여덟을 「팔달」이라 했는데, 명제는 이들이 부화를 키운다 하여 모두 벼슬을 빼앗고 막았습니다. 『부자』는 하후현이 귀한 신하의 아들로 일찍 이름이 높아 하안 · 등양 무리의 우두머리였다고 하고, 그가 사귀기를 청했으나 부하는 그를 두고 뜻은 크지만 헛된 이름을 모을 뿐 실제 재주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정시 초 조상이 정사를 보필하자 하후현은 산기상시와 중호군을 거쳤습니다. 『세어』는 그가 사람을 잘 알아보아, 중호군으로 무관을 뽑을 때 고른 이가 모두 뛰어나 뒤에 주와 군을 맡았다고 적습니다. 태부 사마의가 시국을 묻자 하후현은 세 가지를 글로 올렸습니다. 사람을 뽑는 권한은 조정에 두고 고을의 중정은 행실만 매기게 하자는 것, 군수를 없애 주와 현 두 단으로 줄이자는 것, 옷과 수레의 제도를 소박하게 바로잡아 사치를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마의는 모두 매우 좋으나 어진 이를 기다려야 이룰 수 있겠다고 답했고, 하후현은 다시 글을 올려 지금이 고칠 때라고 맞섰습니다.
얼마 뒤 하후현은 정서장군 · 가절 · 도독옹량주제군사가 되었고, 중호군 자리는 사마사가 이었습니다. 정시 5년(244) 그는 조상과 함께 낙곡으로 촉을 쳤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습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의가 하후현에게 흥세의 길은 몹시 험하고 촉이 먼저 차지했으니 나아가 싸우지 못하고 물러날 길마저 끊기면 군을 잃는다고 일렀고, 하후현이 두려워 조상에게 말해 군을 물렸습니다. 『진서』 문제기는 하후현의 부장이던 사마소가 흥세에서 촉이 험한 곳을 지키니 서둘러 군을 돌리라고 권했다고 적고, 곽회전은 선봉 곽회가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군을 빼내 크게 지지는 않았다고 적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이승이 이 무렵 하후현의 장사였습니다.
가평 원년(249)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하후현은 불려 가 대홍려가 되었고 몇 해 뒤 태상으로 옮겼습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촉으로 달아나려던 당숙 하후패가 함께 가자고 했으나, 하후현은 「내가 어찌 구차히 살려고 적의 땅에 손님으로 붙겠는가」 하고 낙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위략』은 그가 서쪽에서 돌아온 뒤 사람을 사귀지 않고 화려한 것을 두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위씨춘추』는 또 가평 3년(251) 사마의가 죽자 허윤이 이제 걱정이 없겠다고 했으나, 하후현은 사마의는 그래도 자신을 옛 친구 집안의 젊은이로 대했지만 사마사와 사마소는 자신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탄식했다고 전합니다.
하후현은 조상 때문에 밀려나 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중서령 이풍은 사마사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마음은 하후현에게 있어, 황후의 아버지 광록대부 장집과 함께 하후현에게 정사를 보필하게 하려 했습니다. 가평 6년(254) 2월 귀인을 봉하는 날 궁문에 늘어선 군사를 틈타 대장군 사마사를 죽이고 하후현으로 대신하며 장집을 표기장군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세어』에 따르면 이풍이 아들 이도를 보내 이 꾀를 알리자 하후현은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라고만 하고 알리지 않았습니다. 꾀를 눈치챈 사마사가 이풍을 불러 죽이고, 하후현과 장집 등을 정위에게 넘겼습니다.
『세어』에 따르면 하후현은 정위에서 진술하기를 마다했고, 정위 종육이 몸소 다스리자 낯빛을 바로 하고 그대가 대신 지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종육은 그의 절개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밤에 진술서를 지어 눈물을 흘리며 보였고, 하후현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이풍 · 하후현 · 장집 등은 모두 삼족이 멸해졌습니다. 하후현은 도량이 넓어 동시에서 베일 때도 낯빛이 변하지 않고 몸가짐이 평소와 같았으니, 그때 나이 마흔여섯이었습니다. 『위씨춘추』는 그가 『악의론』 · 『장량론』과 『본무육형론』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고 적습니다.
진수는 하후현이 법도와 도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나 조상과 안팎으로 얽혀 있었고, 그만한 영화로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어진 이를 끌어들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화를 면할 수 있었겠느냐고 평했습니다.
玄以規格局度,世稱其名,然與曹爽中外繾綣;榮位如斯,曾未聞匡弼其非,援致良才玄格量弘濟,臨斬東巿,顏色不變,舉動自若,時年四十六『삼국연의』 제109~110회
연의에서 하후현은 제109회에 처음 나옵니다. 사마사가 칼을 차고 전각에 오르며 정사를 마음대로 하자, 위주 조방은 곁에 남은 태상 하후현 · 중서령 이풍 · 광록대부 장집을 밀실로 불러 울며 하소연합니다. 하후현은 신의 형 하후패가 촉에 항복한 것은 사마 형제가 해칠까 두려워서였으니 이 도적을 없애면 형도 돌아올 것이라며, 나라의 옛 친척으로서 조서를 받들어 치겠다고 합니다. 조방은 용봉한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조서를 써서 장집에게 줍니다.
세 사람은 동화문을 나서다 사마사와 마주치고, 사마사는 눈물 자국이 남은 그들을 다그칩니다. 일이 새어 나간 것을 안 하후현은 「우리가 운 것은 네가 임금을 떨게 하며 찬역을 꾀하기 때문」이라고 크게 꾸짖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으로 사마사를 치려다 무사에게 붙잡힙니다. 장집의 몸에서 피로 쓴 조서가 나오자 사마사는 세 사람의 허리를 저자에서 베게 하고 삼족을 멸합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이를 때까지 이가 다 부러지고도 웅얼거리며 꾸짖다 죽고, 사마사는 이어 조방을 폐합니다. 제110회에서 병든 사마사는 밤마다 이풍 · 장집 · 하후현 세 사람이 침상 앞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연의에서 하후현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하후상 · 어머니 덕양향주 조씨(조진의 누이) · 누이 하후휘(사마사의 아내) · 당숙 하후패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하후현이 왔소.
말은 낯빛을 바꾸지 않고 하는 것이오.
옥나무라 불린 값은 하겠소.
…흥세에서 진 일은 아직도 부끄럽소.
형장에 서게 되어도 이 낯빛이오.
말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기는 것이오.
졌으나 낯빛은 그대로요.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았소.
졌어도 물러서는 법은 아오.
낯빛은 바꾸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