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원중(元仲) · 205년 무렵 ~ 239년 · 예주 패국 초현 · 조조 휘하
북벌과 요동의 반란을 막아냈으나 토목에 빠져 국력을 소진한 조위의 명제
출전 · 『삼국지』 위서 명제기와 배송지 주의 『위서』 · 『위략』 · 『위말전』 · 『위씨춘추』 · 『한진춘추』 · 손성의 말 · 위서 문제기 · 제왕기 · 후비전과 그 배송지 주의 『한진춘추』 · 조진전 · 신비전 · 촉서 제갈량전 · 오서 육손전
조예는 자가 원중이며 조비와 견씨의 아들입니다. 할아버지 조조가 그를 아껴 늘 곁에 두었고,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서』는 조조가 「나의 터전이 너에 이르러 삼대가 되겠구나」 했다고 적습니다. 열다섯 살인 연강 원년(220)에 무덕후, 황초 2년(221)에 제공, 3년(222)에 평원왕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탓에 태자로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배송지 주의 『위략』은 조비가 곽황후에게 그를 기르게 했고 다른 후궁의 아들 경조왕을 뒤로 삼으려 했다고 적습니다. 같은 주의 『위말전』은 사냥에서 어미 사슴을 쏜 조비가 새끼를 쏘라 하자 그가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이셨으니 신은 차마 그 새끼까지 죽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울어, 조비가 활과 화살을 내려놓고 그를 세울 뜻을 굳혔다고 적습니다. 황초 7년(226) 5월 조비가 위독해지자 태자가 되었고 곧 황제에 올랐습니다.
즉위한 해 8월 손권이 강하를 치자 조정은 구원병을 보내자고 했으나, 조예는 물싸움에 익숙한 손권이 뭍으로 올라온 것은 대비가 없는 틈을 노린 것이니 이미 문빙과 맞선 이상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앞서 변방을 위로하러 보낸 치서시어사 순우가 군사 천여 명을 모아 산에 올라 불을 올리자 손권은 물러갔고, 양양을 친 제갈근은 사마의가 깨뜨렸습니다. 태화 원년(227) 신성태수 맹달이 등지자 사마의가 이듬해 정월 그를 베었습니다. 태화 2년(228) 봄 제갈량이 기산으로 나와 천수 · 남안 · 안정 세 군이 그에게 응하자, 조예는 대장군 조진에게 관중의 군사를 맡기고 장합을 보내 가정에서 제갈량의 군사를 크게 깨뜨리게 했으며 몸소 장안까지 나아갔습니다. 그해 가을 조휴가 석정에서 육손에게 졌고, 겨울에는 학소가 진창을 지켜 제갈량을 물리쳤습니다.
태화 3년(229) 그는 옥사는 천하 사람의 목숨이라며 큰 옥사를 청송관에서 몸소 들었고, 이듬해에는 경전에 밝은 이를 쓰고 겉치레만 좇는 이를 물리치라는 조서를 내리며 아버지의 『전론』을 돌에 새겨 사당 문밖에 세웠습니다. 태화 4년(230) 조진과 사마의에게 촉을 치게 했으나 큰비가 내려 불러들였고, 이듬해 조진이 죽자 사마의에게 제갈량을 막게 했습니다. 번왕을 도읍에 두지 말라는 아버지의 영을 풀어 제왕과 종실이 적자 한 사람씩 데리고 조회하게 했고, 태화 6년(232)에는 제후왕을 모두 군을 나라로 삼게 고쳐 봉했습니다.
청룡 2년(234) 산양공 헌제가 죽자 상복을 입고 곡한 뒤 효헌황제로 추시했습니다. 그해 제갈량이 사곡으로 나와 위수 남쪽에 진을 치자, 조예는 사마의에게 성벽을 굳게 지키기만 하면 적은 얻는 것 없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갈 것이라 이르고 신비에게 부절을 주어 싸움을 막게 했습니다. 손권이 합비 신성을 치자 만총은 성을 버리고 적을 수춘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조예는 선제가 합비 · 양양 · 기산을 지킨 것은 반드시 다툴 땅이기 때문이라며 들어주지 않고 7월 몸소 용주를 타고 동쪽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군사가 수백 리 앞에 이르기 전에 손권이 달아났고, 이윽고 오장원의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물러갔습니다.
청룡 3년(235) 그는 낙양궁을 크게 손보아 소양전과 태극전을 세우고 총장관을 쌓았고, 백성은 농사철을 놓쳤습니다. 양부 · 고당륭 등이 여러 번 간절히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늘 너그럽게 대했습니다. 그해 8월 궁중에서 기른 조방을 제왕으로 삼았습니다. 경초 원년(237) 역법을 고쳐 연호를 경초로 바꾸었고, 총애가 식은 모황후에게 죽음을 내렸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은 이해 장안의 종과 구리 사람, 승로반을 옮기다 반이 부러졌고 공경들에게 흙을 지게 해 방림원에 산을 쌓았다고 적습니다. 관구검이 요동의 공손연을 치다 장맛비로 돌아오자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이라 했고, 경초 2년(238) 조예는 신하들이 많다고 한 군사 4만을 사마의에게 주었습니다. 장맛비로 싸움이 늦어져 불러들이자는 말이 나오자 조예는 사마의가 위태로움에 맞춰 변화를 부리니 공손연을 잡을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다며 물리쳤고, 사마의는 그해 양평에서 공손연을 베었습니다.
그해 12월 병이 든 조예는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았다가 곧 거두고 조상을 앉혔는데, 배송지 주의 『한진춘추』는 중서감 유방과 중서령 손자가 그를 움직였다고 적습니다. 경초 3년(239) 정월 하내에서 급히 불러들인 사마의의 손을 잡고 조상과 함께 어린 아들을 보필하라고 부탁한 뒤, 그날 가복전에서 죽어 고평릉에 묻혔습니다. 명제기는 서른여섯에 죽었다고 적으나, 배송지는 그가 건안 10년(205)에 났으니 서른넷, 많이 쳐도 서른다섯이라고 바로잡았습니다. 아들 셋이 모두 일찍 죽어 궁중에서 기른 여덟 살의 제왕 조방이 뒤를 이었습니다. 손성은 그가 곧은 말을 너그럽게 받아 얼굴을 붉히며 간한 이를 꺾거나 죽인 일이 없었으나, 종실의 울타리를 굳히지 않아 큰 권세가 한쪽으로 쏠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진수는 그가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이 있어 임금의 기개를 갖추었으나, 백성이 지친 때에 서둘러 진시황과 한 무제를 좇아 궁궐 짓기에 힘썼다고 나무랐습니다.
明帝沉毅斷識,任心而行,蓋有君人之至槩焉而遽追秦皇、漢武,宮館是營,格之遠猷,其殆疾乎『삼국연의』 제91~106회
연의에서 조예는 제91회에 처음 나옵니다. 견씨의 아들로 어려서 총명했으나, 어머니가 곽귀비의 참소로 죽은 뒤 곽씨의 손에 길러지고 뒤를 이을 아들로 세워지지 못합니다. 열다섯 살 되던 해 봄 사냥에서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고 새끼를 쏘라 하자 「폐하께서 이미 어미를 죽이셨는데 어찌 차마 새끼까지 죽이겠습니까」 하고 울어, 조비가 활을 땅에 던지고 그를 평원왕에 봉합니다. 조비가 죽어 황제가 되지만, 제갈량이 마속의 꾀를 따라 퍼뜨린 사마의의 모반 방문에 속아 화흠의 말대로 사마의를 벼슬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제갈량이 북쪽으로 나오자 하후무를 대도독으로 보냈다가 세 군을 잃고, 제93회에서는 조진을 대도독으로 삼아 서문 밖까지 배웅합니다. 제94회에서 종요의 권유로 사마의를 다시 불러 몸소 장안에 가고, 맹달의 반란을 먼저 누른 사마의를 칭찬하며 장합을 선봉으로 딸려 보냅니다. 그 뒤로 조진과 사마의를 번갈아 내세워 제갈량과 맞서게 하고, 제103회에서는 손권이 세 길로 쳐들어오자 몸소 합비로 나가며, 사마의가 싸우자고 청하자 신비에게 부절을 주어 싸우지 못하게 합니다.
제105회에서는 제갈량이 죽은 뒤 허창과 낙양에 궁궐을 크게 짓느라 장인 3만과 백성 30만을 부리고, 목숨을 걸고 간한 동심을 서인으로 내치고 장무를 벱니다. 마균을 장안에 보내 한 무제의 승로반을 옮기게 하는데 백량대가 무너져 천여 명이 깔려 죽고, 구리 사람과 반을 낙양으로 가져옵니다. 곽부인을 총애해 모황후에게 죽음을 내리고, 제106회에서는 사마의를 보내 공손연을 벱니다. 모황후의 넋에 시달려 병이 든 그는 연왕 조우가 사양하자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고, 허창으로 불러들인 사마의의 손을 잡고 여덟 살 조방을 부탁한 뒤 서른여섯에 죽습니다. 연의에서 조예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조비 · 어머니 견씨 · 아내 모씨 · 곽씨 · 양자 조방(아들 셋은 일찍 죽음)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위의 황제가 보고 있다.
위의 천자요. 무례는 용납하지 않소.
짐이 직접 듣겠소. 말해 보시오.
…궁을 짓는 일이 급했던가.
짐의 뜻이 흔들리는구려.
촉과 오를 모두 막아 낸 자리요.
…너무 일찍 저무는구나.
위의 하늘은 아직 높다.
…궁을 짓느라 국력을 썼는가.
…궁을 짓느라 날을 다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