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王淩

자 언운(彦雲) · 172년 ~ 251년 · 병주 태원군 기현 · 조조 휘하

왕릉 초상

회남에서 처음으로 사마의에게 맞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태위

능력치

통솔74무력64지력71정치83매력73

카드

공격력 4체력 4비용 3값어치 10직군 능리
위계 비용 2
적 하나가 이번 국면 반격하지 못한다

정사

출전 · 『삼국지』 위서 왕릉전과 배송지 주의 『위략』 · 『한진춘추』 · 간보 『진기』 · 『위씨춘추』 · 『위말전』 · 위서 삼소제기 · 만총전 · 곽회전과 배송지 주의 『세어』 · 『진서』 선제기

왕릉은 자가 언운이며 태원군 기현 사람입니다. 숙부 왕윤은 한나라의 사도로서 동탁을 죽였는데, 동탁의 부장 이각 · 곽사 등이 원수를 갚겠다며 장안에 들어와 왕윤을 죽이고 그 집안을 모두 해쳤습니다. 그때 둘 다 어렸던 왕릉과 형 왕신은 성을 넘어 빠져나가 고향으로 달아났습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발간현의 장이 되었는데,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은 그가 일에 걸려 머리를 깎이고 다섯 해의 형을 받아 길을 쓸고 있을 때, 수레로 지나던 조조가 「이 사람은 왕윤의 형의 아들이고 걸린 죄도 공무 때문일 뿐」이라 하여 효기주부로 뽑게 했다고 적습니다. 차츰 옮겨 중산태수가 되어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렸고, 조조가 승상부의 속관으로 불렀습니다.

문제가 즉위하자 산기상시가 되었고, 연주자사로 나가 장료 등과 광릉에 이르러 손권을 쳤습니다. 강가에서 밤에 큰바람이 불어 오의 장수 여범 등의 배가 북쪽 기슭으로 떠밀려 오자 장수들과 맞받아 쳐서 목을 베고 사로잡고 배를 거두었고, 그 공으로 의성정후가 되고 건무장군이 더해졌습니다. 청주로 옮겨서는 난리를 겪은 바닷가에 법도가 서지 않았으나, 정사를 펴고 가르침을 베풀며 착한 이를 상 주고 악한 이를 벌해 기강이 크게 서니 백성의 칭송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뒤에 조휴를 따라 오를 치다가 협석에서 조휴의 군이 불리해지자 힘껏 싸워 에움을 뚫어 조휴가 화를 면하게 했습니다. 이어 양주와 예주의 자사를 지내며 군사와 백성의 마음을 얻었고, 일찍부터 사이가 좋던 사마랑 · 가규의 이름과 자취를 연주와 예주에서 이었습니다. 『삼국지』 만총전은 양주자사이던 그가 정동장군 만총과 사이가 나빴다고 적습니다. 오의 손포가 거짓 항복을 청했을 때에는 만총이 군사를 주지 않았는데도 7백을 보냈다가 반 넘게 잃었습니다.

정시 초 정동장군 · 가절 · 도독양주제군사가 되었습니다. 정시 2년(241) 오의 대장 전종이 수만으로 작피를 노략하자 여러 군을 이끌고 맞서 둑을 두고 며칠을 힘껏 싸워 물리쳤고, 남향후로 올라 식읍 1,350호를 받고 거기장군 · 의동삼사가 되었습니다. 이때 생질 영호우가 연주자사로 평아에 주둔하니, 외삼촌과 생질이 함께 군사를 맡아 회남의 무거운 일을 오로지했습니다. 왕릉은 그 자리에서 정시 9년(248) 사공이 되었고, 사마의가 조상을 죽인 가평 원년(249) 태위에 올라 절월을 받았습니다.

왕릉과 영호우는 몰래 꾀를 맞추어, 제왕(조방)은 천자의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초왕 조표는 나이가 많고 재주가 있다 하여 그를 허창에 맞아 세우려 했습니다. 249년 9월 영호우가 장수 장식을 백마로 보내 조표와 오가게 했고, 왕릉은 사인 노정을 낙양에 보내 아들 왕광에게 알렸으나 왕광은 「폐립은 큰일이니 화의 앞장을 서지 마십시오」라 했습니다. 『한진춘추』는 왕광이 길게 말린 말을 싣지만, 배송지는 앞선 사서에 없는 말이라 습착치가 지어낸 것으로 의심했습니다. 그해 11월 영호우가 다시 장식을 보냈으나, 장식이 돌아오기 전에 영호우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가평 2년(250) 화성이 남두 별자리에 머물자 왕릉은 「남두 안에 별이 있으니 갑자기 귀해질 이가 있으리라」 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별을 볼 줄 아는 동평의 호상이 그의 뜻에 맞추려고 회남은 초나라의 땅이라 왕이 될 이가 일어나리라 말해 그의 꾀가 굳어졌습니다. 가평 3년(251) 봄 오가 도수를 막자 왕릉은 이를 틈타 일을 일으키려고 적을 치겠다는 표를 올렸으나 조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진서』 선제기는 이것을 거짓으로 아뢴 것이라 적습니다. 왕릉이 장군 양홍을 시켜 폐립의 일을 연주자사 황화에게 알리자, 황화와 양홍은 이름을 나란히 적어 태부 사마의에게 고했습니다.

사마의는 중군을 이끌고 물길로 나서면서 먼저 사면령을 내려 왕릉의 죄를 용서하고, 상서인 아들 왕광을 데려가 편지로 타이르게 한 뒤 대군으로 갑자기 백척에 이르렀습니다.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배를 띄워 물길을 따라 내려가 아흐레 만에 감성에 이르렀다고 적습니다. 형세가 다한 줄 안 왕릉은 홀로 배를 타고 나와 맞으며 연리 왕욱을 보내 죄를 빌고 인수와 절월을 바쳤고, 군이 구두에 이르자 물가에서 스스로 몸을 묶었습니다. 사마의는 조서를 받들어 결박을 풀고 그를 위로한 뒤 인수와 절월을 돌려주고 보병과 기병 6백으로 도읍에 보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배를 몰아 사마의에게 가던 왕릉은 회수 가운데에서 열 길 남짓 떨어진 채 멈추게 되자 「그대가 편지 한 장으로 불렀다면 내가 감히 오지 않았겠소」라 했고, 사마의는 「그대가 편지 한 장에 따라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왕릉이 「그대가 나를 저버렸소」라 하자 사마의는 「나는 차라리 그대를 저버릴지언정 나라는 저버리지 않겠소」라 했습니다.

왕릉은 항에 이르러 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그는 밤에 연리들을 불러 「나이 여든에 몸과 이름이 함께 사라지는가」라며 작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간보의 『진기』는 그가 항에서 물가에 선 가규의 사당을 보고 「가양도여, 왕릉은 진실로 위나라 사직에 충성한 사람이니 그대에게 신령이 있다면 알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적습니다. 『진서』 선제기는 가규의 사당을 지나며 외친 뒤 항에 이르러 짐독을 마셨다고 적습니다. 사마의는 수춘에 이르러 일을 끝까지 캐어 조표에게 죽음을 내리고 얽힌 이들을 모두 삼족까지 죽였습니다. 조정은 『춘추』의 뜻을 들어 왕릉과 영호우의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개고 가까운 저자에 사흘 동안 주검을 드러냈으며, 인수와 조복을 불사르고 맨흙에 묻었습니다. 간보의 『진기』는 그해 8월 병든 사마의가 왕릉과 가규가 탈이 되는 꿈을 꾸고 몹시 꺼리다가 죽었다고 적습니다.

아들 왕광은 뜻이 높고 학문과 행실이 있었는데 마흔 남짓에 죽었습니다. 『위씨춘추』는 그 아우 왕비효 · 왕금호도 재주와 무용이 남달랐다 하고, 사마의가 묻자 장제가 「왕릉은 문무를 고루 갖추어 지금 짝이 없고, 왕광 등은 뜻과 힘이 아비보다 낫다」고 했다가 물러나 「내 이 말이 남의 집안을 멸하게 했다」며 뉘우쳤다고 전합니다. 『세어』에 따르면 곽회의 아내는 왕릉의 누이여서 연좌되어 끌려가게 되었으나, 다섯 아들이 머리를 찧으며 청하자 곽회가 사람을 보내 되찾아 오고 사마의에게 글을 올려 용서를 받았습니다. 진수는 왕릉이 풍모와 절개가 높았으나, 관구검 · 제갈탄 · 종회와 함께 이름을 날려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마음은 크고 뜻은 엇나가 화를 헤아리지 않다가 일족을 망쳤다고 평했습니다.

王凌風節格尚
왕릉은 풍모와 절개가 높았다『삼국지』 위서 왕관구제갈등종전 평
賈梁道,王凌固忠於魏之社稷者,唯爾有神,知之
가양도여, 왕릉은 진실로 위나라 사직에 충성한 사람이니 그대에게 신령이 있다면 알 것이다『삼국지』 왕릉전 배송지 주에 인용된 간보 『진기』

삼국지연의

연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종강본은 제107회에서 사마의가 조상을 없애고 제108회에서 가평 3년(251) 가을 사마의가 병들어 죽는 것을 적지만, 그해 봄 회남에서 있었던 왕릉의 모의와 죽음은 다루지 않습니다.

생애

  1. 192숙부 왕윤이 이각 · 곽사에게 죽자 형 왕신과 성을 넘어 고향으로 달아났습니다.
  2. 228조휴를 따라 오를 치다 협석에서 힘껏 싸워 에움을 뚫고 조휴를 구했습니다.
  3. 241작피로 쳐들어온 오의 전종을 며칠 싸워 물리치고 거기장군이 되었습니다.회수를 거스른 배
  4. 248생질 영호우와 함께 회남의 군사를 맡은 채 사공이 되었습니다.
  5. 249태위에 오르고, 영호우와 함께 초왕 조표를 허창에 세우려 꾀했습니다.
  6. 251고발을 받은 사마의가 물길로 오자 구두의 물가에서 스스로 몸을 묶었습니다.
  7. 251도읍으로 끌려가던 길에 항에서 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숙부 왕윤 · 형 왕신 · 아들 왕광 · 왕비효 · 왕금호 · 막내(자 명산) · 누이(곽회의 아내)

인연

숙적 싸움터에서 마주치면 서로 공격이 오른다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회남의 왕릉이오.

말을 열며

숙부가 동탁을 베었소. 그 피가 내게도 있소.

되받으며

임금이 어리면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소.

말문이 막혀

…회수를 그리 빨리 거슬러 올 줄은 몰랐소.

말문이 막혀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였소.

설전을 이기고

옳고 그름은 하늘이 아오.

설전에 지고

내 마음은 하늘이 아오.

이긴 뒤

바로잡는 싸움이었소.

진 뒤

일이 새어 나갔을 뿐이오.

쓰러지며

내 마음은 하늘이 아오.

같은 기치 아래

조조하후연하후돈서황학소허저조인전위문앙우금악진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