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백묘(伯苗) · 178년 무렵 ~ 251년 · 형주 의양군 신야현 · 유비 휘하
입술과 이의 이치로 손권을 달래 오와의 화친을 되살린 촉의 사신
출전 · 『삼국지』 촉서 등지전 · 종예전 · 장예전 · 조운전과 배송지 주의 『조운별전』 · 제갈량전 · 왕평전 · 후주전 · 오서 오주전과 주의 『오력』 · 등지전 주의 『화양국지』 · 『화양국지』 유후주지
등지는 자가 백묘이며 의양군 신야 사람으로, 후한의 사도 등우의 후손입니다. 한나라 말에 촉으로 들어갔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 관상을 잘 보던 익주종사 장유는 찾아온 등지에게 「그대는 나이 일흔을 넘기고 벼슬이 대장군에 이르며 후에 봉해질 것」이라 했습니다. 등지는 파서태수 방희가 선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가서 몸을 맡겼습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214) 비현의 저각독(창고를 맡은 벼슬)이 되었는데, 비현에 나온 유비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겨 비현령으로 뽑았고, 이어 광한태수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맑고 엄하게 다스려 치적이 있었고, 들어와 상서가 되었습니다.
장무 3년(223) 유비가 영안에서 죽었습니다. 그에 앞서 오왕 손권이 화친을 청해 유비는 송위 · 비의 등을 여러 번 보내 답했으나, 승상 제갈량은 손권이 유비의 죽음을 듣고 다른 꾀를 낼까 깊이 걱정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등지가 제갈량을 찾아가 「지금 주상이 어리고 막 자리에 올랐으니 큰 사신을 보내 오와의 우호를 거듭 다져야 한다」고 하자, 제갈량은 「내가 오래 생각했으나 사람을 얻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얻었다」며 그 사람이 바로 그대라고 했습니다. 『삼국지』 장예전은 제갈량이 이때 등지에게 말하는 틈에 옹개에게 묶여 오로 보내졌던 장예를 돌려 달라고 청하게 했고, 손권이 이를 들어주었다고 적습니다.
손권은 과연 의심하며 선뜻 만나 주지 않았고, 등지는 스스로 글을 올려 「신이 지금 온 것은 오를 위해서이기도 하지 촉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며 뵙기를 청했습니다. 손권은 촉과 화친하고 싶으나 촉의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작아 위에 틈을 잡힐까 저어해 머뭇거린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등지는 「오와 촉 두 나라는 네 주의 땅을 가졌고, 대왕은 한 시대의 영웅이며 제갈량 또한 한때의 호걸입니다. 촉에는 겹겹의 험한 요새가 있고 오에는 세 강의 막음이 있으니, 두 장점을 합쳐 입술과 이처럼 서로 기대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물러나서는 솥발처럼 설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대왕이 위에 몸을 맡기면 위는 대왕의 입조와 태자를 볼모로 요구할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반역을 친다며 쳐들어올 것이며, 촉도 물길을 따라 기회를 보아 나아갈 것이니 강남의 땅은 더는 대왕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손권은 한참 말이 없다가 「그대 말이 옳소」 하고 스스로 위와 끊고 촉과 손을 잡았으며, 장온을 보내 답례했습니다. 오주전은 황무 2년(223) 겨울 11월 촉의 중랑장 등지가 왔다고 적고,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력』은 촉이 말 200필과 비단 1천 단을 보냈고 이로부터 사신이 늘 오가게 되었다고 적습니다.
촉은 다시 등지를 보냈습니다. 손권이 「천하가 태평해져 두 임금이 나누어 다스리면 즐겁지 않겠소」 하자, 등지는 「하늘에 해가 둘이 없고 땅에 왕이 둘이 없습니다. 위를 아우른 뒤에도 대왕께서 천명을 깊이 알지 못하신다면, 임금은 저마다 덕을 닦고 신하는 저마다 충성을 다해 북채를 들고 북을 울리니 싸움이 비로소 시작될 따름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손권은 크게 웃으며 「그대의 정성이 이러하구려」 했고, 제갈량에게 글을 보내 「정굉은 말이 들떠 과장되고 음화는 뜻을 다 전하지 못하니, 두 나라를 화합시킨 것은 오직 등지뿐」이라 했습니다.
건흥 5년(227) 제갈량이 북으로 한중에 머물자 등지는 중감군 · 양무장군이 되었습니다. 이듬해(228) 제갈량은 사곡 길로 미를 친다고 소문을 내고 조운과 등지를 의병(속이는 군사)으로 삼아 기곡을 지키게 했고, 위의 대장군 조진이 무리를 들어 막았습니다. 조운전은 군사가 약하고 적이 강해 기곡에서 졌으나 무리를 거두어 굳게 지켜 크게 지지는 않았다고 적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에서 제갈량이 가정의 군은 물러날 때 서로를 잃었는데 기곡의 군은 그렇지 않았던 까닭을 묻자, 등지는 「조운이 몸소 뒤를 끊어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았으니 장수와 병사가 서로를 잃을 까닭이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제갈량이 죽자(234) 등지는 전군사 · 전장군이 되어 연주자사를 겸하고 양무정후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강주를 맡았습니다. 손권은 여러 번 그와 소식을 주고받으며 선물을 넉넉히 보냈고, 왕평전은 그 무렵 동쪽의 등지 · 남쪽의 마충 · 북쪽 국경의 왕평이 모두 이름난 자취를 남겼다고 적습니다.
연희 6년(243) 거기장군이 되었고 뒤에 부절을 받았습니다. 연희 10년(247) 강주에서 조정에 온 등지가 막 군사를 맡은 종예에게 「예법에 예순이면 군역에 나가지 않는데 그대는 이제야 군사를 받으니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놀리자, 종예는 「그대는 일흔에도 군사를 내놓지 않는데 나는 예순이라고 어찌 받지 못하겠소」라고 받았습니다. 종예전은 등지가 교만해 대장군 비의 등도 모두 그를 피해 낮추었으나 종예만은 굽히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연희 11년(248) 부릉국 사람들이 도위를 죽이고 반란하자 등지는 군을 이끌고 가서 곧바로 그 우두머리를 베어 달았고, 백성들이 편안해졌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화양국지』는 이때 등지가 산을 오르는 검은 원숭이를 쇠뇌로 쏘아 맞혔는데, 원숭이가 화살을 뽑고 나뭇잎을 말아 상처를 막자 「아, 내가 만물의 본성을 어겼으니 곧 죽겠구나」 하고 탄식했다고 전합니다. 연희 14년(251)에 죽었습니다.
등지는 장군으로 스무 해 남짓 있으면서 상과 벌이 밝고 결단이 있었고 병사를 잘 보살폈습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나라의 녹에 기대어 구차하게 검소한 척하지 않았으나 끝내 사사로이 재산을 늘리지 않아, 처자가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했고 죽는 날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습니다. 성품이 굳세고 소탈해 기분을 꾸미지 않았으므로 선비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때 사람 가운데 그가 공경하고 귀하게 여긴 이는 적었으나 오직 강유만은 남다르게 보았습니다. 아들 등량이 작위를 이어 경요 연간에 상서좌선랑이 되었고, 진나라 때 광한태수를 지냈습니다. 진수는 「등지는 굳고 곧으며 소탈하고 밝아, 벼슬에 있으면서 집안을 잊었다」고 평했습니다.
鄧芝堅貞簡亮,臨官忘家合此二長,共為脣齒,進可並兼天下,退可鼎足而立,此理之自然也『삼국연의』 제65회 · 제85~100회
연의에서 등지는 제65회에 익주를 얻은 유비가 벼슬을 준 유장의 옛 신하들 가운데 이름이 처음 보입니다. 제85회에서 위의 조비가 다섯 갈래로 촉을 치자 제갈량은 네 갈래를 막을 계책은 이미 세웠으나 오를 달랠 말 잘하는 사람을 얻지 못해 고민하는데, 후주를 배웅하러 나온 제갈량이 문밖에 모인 벼슬아치들 가운데 하늘을 보며 웃는 사람을 보고 불러 보니 의양 신야 사람으로 자가 백묘이고 한나라 사마 등우의 후손이며 호부상서인 등지였습니다. 제갈량이 먼저 칠 나라를 묻자 등지는 위는 한의 도적이나 세력이 커서 천천히 도모해야 하고 지금은 오와 손을 잡아 입술과 이가 되어야 한다고 답했고, 제갈량은 「내가 오래 생각했으나 사람을 얻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얻었다」며 그를 오에 보냅니다.
제86회에서 장소의 꾀를 따른 손권은 궁전 앞에 큰 솥을 걸어 기름 수백 근을 끓이고 칼 · 도끼 · 창을 든 무사 천 명을 궁문에서 전각까지 늘어세운 뒤 등지를 부릅니다. 등지는 두려운 빛 없이 걸어 들어가 끓는 기름 솥을 보고도 살짝 웃으며 절하지 않았고, 역이기처럼 삶아 주겠다는 손권에게 「동오에 어진 이가 많다더니 선비 하나를 두려워하는구나」 하고 크게 웃습니다. 손권이 무사를 물리고 자리를 내주자, 등지는 촉에는 산천의 험함이 있고 오에는 세 강의 굳음이 있으니 입술과 이처럼 손잡으면 천하를 아우르거나 솥발처럼 설 수 있다고 달랬고, 자기 말이 옳지 않다면 대왕 앞에서 죽어 유세객이라는 이름을 끊겠다며 옷자락을 걷고 기름 솥으로 뛰어들려 합니다. 손권은 급히 말리고 뒤 전각으로 불러들여 귀한 손님의 예로 대접하며 촉과 손잡기로 합니다. 등지는 장온과 함께 촉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장온과 오에 가서, 두 임금이 나누어 다스리면 즐겁지 않겠느냐는 손권에게 하늘에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 왕이 둘이 없으니 임금은 덕을 닦고 신하는 충성을 다하면 싸움이 비로소 그칠 것이라 답합니다.
제91회에서 등지는 늙은 조운이 선봉을 고집하자 스스로 나서 함께 가겠다고 하고, 제92회에서 봉명산의 조운이 한덕의 네 아들을 베자 「장군은 나이 일흔에도 용맹이 예전 같다」고 치하하며, 이튿날 다시 오는 적에게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 조운에게 일깨웁니다. 제95회에서 조운과 함께 기곡에 의병으로 나섰다가, 제96회에서 한 사람 한 기도 잃지 않고 돌아와 제갈량에게 조운이 홀로 뒤를 끊어 물자를 버리지 않았다고 아룁니다. 제100회에서는 참모로 기곡의 위연 · 진식에게 가볍게 나아가지 말라는 명을 전하고, 명을 어긴 진식이 크게 지자 제갈량의 명으로 그를 달래러 갑니다. 연의에서 등지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제105회에 손권이 종예를 두고 「등지에 못지않다」고 하는 말로 이름만 불립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등량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말로도 칼로도 물러서지 않소.
촉의 사자요. 가마솥이 끓어도 할 말은 하겠소.
겁을 주어도 말은 달라지지 않소.
…솥이 정말 뜨겁구려.
물러서면 국서가 무거워지오.
두 나라가 손을 잡아야 셋이 서오.
…사자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구려.
담력으로 얻은 것이오.
…가마솥 앞이 더 쉬웠구려.
가마솥 앞에서도 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