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회郭淮

자 백제(伯濟) · 미상 ~ 255년 · 병주 태원군 양곡현 · 사마의 휘하

곽회 초상

사마의를 보좌해 촉나라의 북벌을 굳건히 막아낸 위나라 옹·양주의 수호자

능력치

통솔87무력78지력82정치75매력76

카드

공격력 5체력 6비용 4값어치 13직군 모사
엄호 호령
값이 가장 큰 아군을 지킨다 · 그 아군이 맞으면 이 장수가 멀미·행동 무관 1회 반격 없이 방금 친 그 적을 즉시 되받아친다 (다음 제 차례까지)

정사

출전 · 『삼국지』 위서 곽회전과 배송지 주의 『곽씨보』 · 『세어』 · 『진제공찬』 · 진태전 · 촉서 제갈량전 · 위연전 · 후주전 · 강유전과 배송지 주의 『위략』

곽회는 자가 백제이며 태원군 양곡현 사람입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곽씨보』는 할아버지 곽전이 대사농, 아버지 곽온이 안문태수였다고 적습니다.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평원부승이 되었고, 오관중랑장이던 조비가 그를 불러 문하적조로 삼았으며, 승상부의 병조의령사로 옮겨 조조를 따라 한중을 쳤습니다.

조조가 돌아가며 정서장군 하후연을 남겨 유비를 막게 하자 곽회는 하후연의 사마가 되었습니다. 건안 24년(219) 하후연이 유비와 싸울 때 곽회는 병이 나서 나가지 않았는데, 하후연이 죽어 군중이 어수선해지자 흩어진 군사를 거두고 탕구장군 장합을 군의 주인으로 떠받들어 여러 진영을 가라앉혔습니다. 이튿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 치려 하자 장수들은 물에 기대어 진을 치자고 했으나, 곽회는 그것은 약함을 보일 뿐 적을 꺾지 못한다며 물에서 떨어져 진을 치고 적이 반쯤 건넜을 때 치자고 했습니다. 진을 치자 유비는 의심하여 건너지 않았고, 곽회는 굳게 지키며 물러설 뜻이 없음을 보였습니다. 조조는 이를 좋게 여겨 장합에게 부절을 내리고 곽회를 다시 사마로 삼았습니다.

조비가 위왕이 되자(220) 관내후의 작위를 받고 진서장사가 되었으며, 정강호군의 일을 맡아 장합과 양추를 감독하며 산적 정감과 노수의 반란한 호족을 평정하니 관중이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그해 조비의 즉위를 하례하러 가다가 병이 나 늦게 닿자, 조비는 우임금이 도산에 제후를 모았을 때 늦게 온 방풍을 죽인 일을 들어 꾸짖었습니다. 곽회가 「오제는 덕으로 백성을 이끌었고 하나라의 정치가 쇠하고서야 형벌을 썼으니, 지금 신은 요순의 세상을 만났기에 방풍처럼 죽지 않을 줄 압니다」라고 답하자, 조비는 기뻐하며 그에게 옹주자사의 일을 맡기고 사양정후에 봉했으며, 황초 5년(224) 정식 자사가 되었습니다. 강족이나 호족이 항복해 올 때마다 곽회는 먼저 사람을 보내 그 친족과 남녀의 수, 나이를 알아 두었다가 만나서 하나하나 자세히 물으니, 모두 그를 신명하다 일컬었습니다.

태화 2년(228) 제갈량이 기산으로 나와 마속을 가정에, 고상을 열류성에 두자, 장합이 마속을 치고 곽회는 고상의 진영을 쳐서 둘 다 깨뜨렸습니다. 또 농서의 강족 당제를 포한에서 깨뜨려 건위장군이 되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이해 제갈량이 기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곽회는 천수태수 마준과 그 관속을 데리고 낙문을 돌아보던 길이었는데, 「일이 좋지 않겠다」며 곧 상규로 돌아갔습니다. 마준도 그를 따라가는 바람에 남겨진 강유가 제갈량에게 가게 되었다고 『위략』은 적습니다. 이듬해 촉의 진식이 무도와 음평을 치자 곽회가 이를 치려 했으나 제갈량이 몸소 건위로 나오자 물러났고, 건흥 8년(230)에는 강족의 땅에 들어온 위연에게 양계에서 크게 졌다고 촉서는 적습니다. 태화 5년(231) 촉군이 노성으로 나왔을 때 농우에 곡식이 없어 관중에서 크게 실어 오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곽회가 위엄과 은혜로 강족과 호족을 달래 집마다 곡식을 내게 하니 군량이 넉넉해졌고 양무장군이 되었습니다.

청룡 2년(234) 제갈량이 사곡으로 나와 난갱에 둔전하고 사마의가 위수 남쪽에 진을 쳤을 때, 곽회는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을 다툴 것이니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다고 했으나 그는 제갈량이 위수를 건너 북원에 오르고 북산까지 군사를 잇대면 농으로 가는 길이 끊기고 백성과 이민족이 흔들린다고 했고, 사마의가 옳게 여겨 곽회가 북원에 진을 쳤습니다. 해자와 보루가 다 되기 전에 촉군이 크게 이르자 곽회는 맞받아쳤습니다. 며칠 뒤 제갈량이 군사를 크게 벌여 서쪽으로 가자 장수들은 서쪽 진영을 치려는 것이라 했으나, 곽회만은 서쪽에 모양을 보여 관군을 그리로 몰려는 것이니 반드시 양수를 칠 것이라 보았고, 그날 밤 촉군은 과연 양수를 쳤으나 대비가 있어 오르지 못했습니다.

정시 원년(240) 촉장 강유가 농서로 나오자 강중까지 쫓았고, 강유가 물러나자 강족 미당 등을 치고 저족 3천여 부락을 달래 관중으로 옮겨 좌장군이 되었습니다. 정시 5년(244) 하후현이 촉을 칠 때 앞장섰으나 형세가 이롭지 않음을 헤아려 곧 군사를 빼내 크게 지지 않았습니다. 정시 8년(247) 농서 · 남안 · 금성 · 서평의 강족이 들고일어나 촉군을 부르자 사람들은 먼저 포한을 평정하자고 했는데,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위시의 하후패를 칠 것이라 헤아려 남쪽으로 돌아 하후패를 맞으러 갔고, 위시를 치던 강유는 곽회의 군이 이르자 물러갔습니다. 이어 강족의 우두머리 아하와 소과를 베니 항복한 부락이 1만여였고, 이듬해에는 위쪽으로 건너는 척하고 아래쪽에서 몰래 건너 백토성의 강족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강유가 서쪽으로 호족 치무대를 맞으러 가면서 음평태수 요화를 성중산에 남겨 성을 쌓게 하자, 곽회는 군사를 나누지 말자는 장수들의 말을 물리치고 「요화를 치면 강유가 반드시 돌아볼 것이니 한 번에 둘을 온전히 하는 꾀」라며 요화를 쳤습니다. 강유가 과연 급히 돌아와 요화를 구하니 모두 곽회의 꾀대로였고, 그는 도향후로 올랐습니다.

가평 원년(249) 정서장군 · 도독옹량제군사가 되었고, 이해 옹주자사 진태와 꾀를 합쳐 국산에 성을 쌓은 촉의 아문장 구안 등을 항복시켰습니다. 진태전에 따르면 성을 에워싸 물을 끊자는 꾀와 우두산으로 가서 강유의 돌아갈 길을 끊자는 꾀는 진태가 냈고, 곽회가 이를 따라 조수로 나아가자 강유가 달아났습니다. 가평 2년(250) 조서는 한천의 싸움에서 곽회가 위태로움을 건졌고 관서에 서른 해 넘게 있으며 밖으로 적을 치고 안으로 백성과 이민족을 달랬다며 그를 거기장군 · 의동삼사로 삼고 양곡후로 올렸습니다. 『세어』에 따르면 곽회의 아내는 왕릉의 누이여서 왕릉이 죽임을 당하자 연좌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곽회는 처음에 아내를 붙잡지 않았으나, 다섯 아들이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며 빌자 차마 보지 못해 사람을 보내 되찾아 오고, 「다섯 아들이 없으면 저 곽회도 없습니다」라는 글을 사마의에게 보냈으며 사마의도 그를 용서했습니다.

정원 2년(255) 곽회가 죽자 대장군으로 추증되고 시호를 정후라 했습니다. 아들 곽통이 뒤를 이어 형주자사에 이르렀고, 함희 연간에는 앞 조정에서 세운 공으로 손자 곽정이 분양자로 고쳐 봉해졌습니다. 『진제공찬』은 아우 곽배가 성양태수에 이르렀고 배수와 가충이 모두 곽배의 사위였다고 적습니다. 진수는 「곽회는 방책이 정밀하고 자세했다」고 평했습니다.

郭淮方策精詳
곽회는 방책이 정밀하고 자세했다『삼국지』 위서 만전견곽전 평
若亮跨渭登原,連兵北山,隔絕隴道,搖盪民、夷,此非國之利也
제갈량이 위수를 건너 북원에 오르고 북산까지 군사를 잇대어 농으로 가는 길을 끊고 백성과 이민족을 흔들면, 나라에 이롭지 않다『삼국지』 위서 곽회전 · 곽회의 말

삼국지연의

『삼국연의』 제70회 · 제93~95회 · 제97~99회 · 제101~103회 · 제107~109회

연의에서 곽회는 제70회에 조홍의 행군사마로 처음 나옵니다. 와구관에서 군사를 다 잃고 돌아온 장합을 조홍이 베려 하자 「삼군은 얻기 쉬워도 장수 하나는 구하기 어렵다」며 말리고, 다시 군사를 주어 가맹관을 치게 하자고 합니다.

제93회에서 조진은 제갈량을 막으러 나서며 태원 양곡 사람으로 옹주자사인 곽회를 부도독으로 천거합니다. 왕랑이 죽은 뒤 곽회는 촉군이 상을 치르는 틈을 노려 영채를 습격할 꾀를 내지만 도리어 크게 지고, 제94회에서는 서강에 구원을 청하자고 했다가 두 선봉 조준과 주찬을 잃습니다. 제95회에서 가정의 공을 사마의에게 빼앗길까 열류성으로 갔다가 성 위에 이미 사마의가 서 있자 「중달의 신기에는 내가 미치지 못한다」며 놀라고, 조진과 함께 세 군을 되찾아 제 공으로 삼습니다.

제98회에서는 제갈량을 굳게 지켜 막으라는 조서를 보고 「뒷날 촉군을 막을 이는 반드시 중달」이라 하며, 학소가 앓아눕자 장합을 보내 대신하게 합니다. 제99회에서 손례와 함께 무도와 음평을 구하러 갔다가 제갈량에게 크게 지고, 제101회에서는 노성을 치다 집니다. 제102회에서 사마의에게 촉군이 위수를 건너 북원에 오르면 농으로 가는 길이 끊긴다고 말해 북원을 지키게 되지만, 왕평이 버리고 간 목우유마를 몰고 가려다 혀를 비틀어 둔 꾀에 걸려 「신이 돕는 것」이라며 놀랍니다.

제107회에서 옹주자사 곽회는 반기를 든 하후패와 싸우다 진태와 함께 그를 쳐서 몰아내고, 국산에 두 성을 쌓은 촉군을 진태와 에워싸 물줄기를 끊으며, 진태의 말에 따라 조수를 차지해 강유의 군량길을 끊습니다. 마지막은 제109회입니다. 철롱산에 갇힌 사마소를 구하러 가면서 진태의 거짓 항복 꾀로 강족의 왕 미당을 사로잡아 달래 앞세우고 강유의 진영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진 강유를 쫓아 활을 쏘았다가 강유가 그 화살을 받아 되쏜 것에 맞아 떨어지고, 진영으로 돌아와 화살촉을 뽑았으나 피가 멎지 않아 죽습니다. 연의에서 곽회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정사와 연의가 다른 곳

생애

  1. 219하후연이 죽자 흩어진 군사를 거두고 장합을 군의 주인으로 세워 진영을 가라앉혔습니다.
  2. 220장합 · 양추를 감독하며 산적 정감과 노수의 호족을 평정했습니다.달래고 눌러 서쪽을 잡다
  3. 220하례에 늦은 일을 방풍의 옛일로 받아넘겨 조비의 마음을 사고 옹주자사의 일을 맡았습니다.
  4. 224정식 옹주자사가 되었습니다.
  5. 228제갈량의 첫 북벌에서 열류성의 고상을 깨뜨리고 건위장군이 되었습니다.북방의 두 장수
  6. 229무도 · 음평을 친 진식을 치려다 제갈량이 건위로 나오자 물러났습니다.
  7. 230강족의 땅으로 들어온 촉의 위연에게 양계에서 크게 졌습니다.양계의 싸움
  8. 231강족과 호족에게서 곡식을 거두어 군량을 대고 양무장군이 되었습니다.
  9. 234북원을 먼저 차지하고 양수를 노린 촉군을 미리 막았습니다.
  10. 240농서로 나온 강유를 강중까지 쫓고 강족 미당을 쳐서 좌장군이 되었습니다.
  11. 244하후현의 촉 정벌에서 형세가 나쁘다고 보고 군사를 빼내 크게 지지 않았습니다.
  12. 247강족의 반란에 호응한 강유가 위시를 치자 때맞추어 이르러 물리쳤습니다.
  13. 248성중산의 요화를 쳐서 강유를 급히 돌아오게 하고 도향후가 되었습니다.
  14. 249정서장군 · 도독옹량제군사가 되어 진태와 함께 국산의 구안을 항복시켰습니다.
  15. 250거기장군 · 의동삼사가 되고 양곡후로 올랐습니다.
  16. 251왕릉의 일에 연좌된 아내를 되찾아 오고 사마의에게 글을 보내 용서받았습니다.
  17. 255죽어 대장군으로 추증되고 시호를 정후라 했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할아버지 곽전 · 아버지 곽온 · 아내 왕씨(왕릉의 누이) · 아들 다섯(곽통) · 아우 곽배 · 곽진

인연

숙적 싸움터에서 마주치면 서로 공격이 오른다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옹주의 군사가 여기 있다.

말을 열며

곽백제요. 서쪽 국경은 내가 맡았소.

되받으며

형세부터 살피고 답하겠소.

말문이 막혀

…또 넘어오는가.

말문이 막혀

방비를 다시 세워야겠군.

설전을 이기고

지키는 일에 실수는 없소.

설전에 지고

…한 곳이 뚫렸구려.

이긴 뒤

관서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진 뒤

…한 자락을 내주었군.

쓰러지며

관서의 문은… 닫지 마라.

같은 기치 아래

사마의양호사마사사마소왕준손례진태위관왕기왕창가충두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