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백옥(伯玉) · 220년 ~ 291년 · 사례 하동군 안읍현 · 사마의 휘하
밤에 성도로 들어가 등애를 사로잡고 종회의 난을 꺾은 감군
출전 · 『진서』 위관전과 사신의 평 · 문제기 · 무제기 · 혜제기 · 후비전 · 『삼국지』 위서 등애전 · 종회전과 배송지 주의 『위씨춘추』 · 『한진춘추』 · 위기전과 배송지 주의 『진양추』 · 삼소제기 · 『세설신어』 규잠편
위관은 자가 백옥이며 하동군 안읍 사람입니다. 『진서』 위관전에 따르면 고조 위고가 후한 명제 때 유학으로 대군에서 부름을 받아 가다가 하동 안읍에서 죽자, 조정이 그 땅을 내려 장사 지내게 하여 자손이 그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위기는 위나라의 상서였습니다. 위관은 열 살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효성이 남달랐고, 성품이 곧고 고요하며 이치에 밝아 맑고 공정하다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아버지의 작위인 문향후를 이었습니다.
스무 살 무렵 위나라의 상서랑이 되었는데, 그때 위의 법이 엄하고 가혹하여 어머니 진씨가 걱정하자 스스로 청해 통사랑으로 옮겼고 이어 중서랑이 되었습니다. 권신이 정사를 휘두르던 때였으나 위관은 그 사이에서 넉넉히 지내며 누구와도 가까이하거나 멀리하지 않았고, 대신 부하는 그를 몹시 중히 여겨 춘추 시대 위나라의 대부 영무자에 견주었습니다. 산기상시까지 오른 뒤 진류왕이 즉위하자 시중이 되어 부절을 들고 하북을 위로했고, 몇 해 뒤 정위경이 되어 송사를 실정대로 살폈습니다.
경원 4년(263) 등애와 종회가 촉을 칠 때 위관은 정위경의 자리 그대로 부절을 받아 두 사람의 군사를 감독하고 진서군사의 일을 대행했으며 군사 1천을 받았습니다. 촉이 평정되자 등애가 황제의 명을 빙자해 제멋대로 벼슬을 내렸습니다. 『삼국지』 등애전에 따르면 사마소가 감군 위관을 시켜 아뢰고 기다리라고 타일렀으나 등애는 듣지 않았습니다. 딴마음을 품은 종회는 등애의 전횡을 빌미로 위관과 함께 몰래 그 형상을 아뢰었고, 조서가 내려 등애를 함거로 불러들이게 했습니다.
함희 원년(264) 정월 종회는 위관을 먼저 보내 등애를 거두게 했습니다. 위관의 군사가 적으니 등애가 그를 죽이게 하여 등애의 죄를 더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위관은 그것을 알면서도 마다할 수 없어, 밤에 성도에 이르러 등애가 거느린 장수들에게 격문을 돌렸습니다. 조서를 받들어 등애만 거두고 나머지는 하나도 묻지 않으며, 관군에게 오면 벼슬과 상을 예전대로 주고 나오지 않는 이는 삼족을 벤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닭이 울 무렵 장수들이 모두 위관에게 왔고 등애의 장막 안 사람만 남았습니다. 날이 밝자 위관은 사자의 수레를 타고 곧장 성도의 전각 앞에 이르렀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등애는 아들과 함께 붙잡혔습니다. 등애의 장수들이 그를 빼앗으려 몰려오자 위관은 표문의 초안을 꾸며 보여 달랬습니다. 『삼국지』 종회전은 위관이 종회보다 앞서 가서 사마소의 친필 영을 알리자 등애의 군사가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적습니다.
곧이어 성도에 이른 종회는 호열 등 장수들을 모두 불러 가두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종회는 위관을 곁에 붙들어 두고 「호열 등을 죽이려 한다」고 판자에 적어 보였으나 위관이 허락하지 않아 둘은 서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위관은 뒷간에 가는 길에 호열의 옛 심부름꾼을 만나 삼군에 종회의 반란을 알리게 했고, 종회와 위관은 밤을 새우며 저마다 무릎 위에 칼을 가로놓았습니다. 종회가 군사들을 위로하라고 하자 위관은 「경이 삼군의 주인이니 몸소 가셔야 한다」고 했고, 종회는 「경은 감사이니 먼저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위관이 전각을 내려가자 종회는 뉘우쳐 다시 불렀으나, 위관은 어지럼증이 도졌다며 짐짓 쓰러졌고 바깥 관사에 이르러 소금물을 마시고 크게 토했습니다. 본디 여윈 몸이라 위독해 보였고, 종회가 보낸 의원도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하자 종회는 그를 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문이 닫히자 위관은 격문을 지어 여러 군에 알렸고, 이튿날 새벽 여러 군이 함께 종회를 쳐서 죽였습니다. 『진서』 문제기는 위관과 호열이 종회를 베었다고 적습니다.
그 뒤 등애 본영의 장병이 함거를 깨뜨리고 등애를 꺼내 성도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위관은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 일이 탈이 날까 두렵고 종회를 벤 공을 홀로 차지하고 싶어, 호군 전속을 면죽으로 보냈습니다. 전속은 밤에 삼조정에서 등애를 습격해 아들 등충과 함께 베었습니다. 앞서 등애가 강유(촉의 고을)로 내려갈 때 전속이 나아가지 않는다며 베려다 용서한 일이 있었는데, 위관은 전속을 보내며 「강유에서 당한 욕을 갚을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일이 평정되자 조정이 위관을 봉하려 했으나, 그는 촉을 이긴 것은 여러 장수의 힘이고 두 장수는 제멋대로 날뛰다 스스로 망했으며 자신은 꾀를 냈을 뿐 깃발을 뺏은 공은 없다며 굳이 사양했고, 진서장군으로 관중을 맡았습니다.
함희 2년(265) 위가 진에 선양하자 위관은 진의 신하가 되었고, 『진서』 무제기는 그해 그를 치양공에 봉했다고 적습니다. 청주와 유주를 맡아 가는 곳마다 다스린 자취를 남겼고, 유주에서는 동쪽의 무환과 서쪽의 역미 사이를 벌려 놓아 무환은 항복하고 역미는 근심하다 죽었습니다. 조정에 들어와 상서령과 사공을 지냈고, 상서랑 색정과 함께 초서를 잘 써서 「일대이묘」(한 관청의 두 묘수)라 불렸습니다.
혜제가 태자일 때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그가 순박하여 정사를 맡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위관은 늘 폐하기를 아뢰고 싶었으나 감히 꺼내지 못하다가, 능운대 잔치에서 취한 척하고 무제의 평상 앞에 꿇어앉아 아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 번 말하려다 그치고는 손으로 평상을 쓰다듬으며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했고, 무제는 뜻을 알아채고도 「공이 정말 크게 취했구려」라고 둘러댔습니다. 이 일로 뒷날의 가황후가 위관을 원망했습니다.
태희 원년(290) 정월 위관은 태보가 되어 집으로 물러났습니다. 혜제가 즉위하고 양준이 죽은 뒤 여남왕 사마량과 함께 조정을 보좌했는데, 여러 왕을 봉국으로 돌려보내자는 뜻에 홀로 찬성해 초왕 사마위의 원한을 샀고, 가황후는 혜제의 손조서를 받아 냈습니다. 291년 6월 사마위는 밤에 청하왕 사마하를 보내 위관을 거두게 했습니다. 좌우가 조서가 거짓일 수 있으니 맞서자고 했으나 위관은 따르지 않았고, 아들 위항 · 위악 · 위예와 손자 등 아홉 사람과 함께 죽었습니다. 나이 일흔둘이었습니다. 뒤에 조정은 촉을 친 공을 좇아 그를 난릉군공에 봉하고 시호를 성이라 했습니다.
두예는 위관이 등애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백옥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명사의 몸으로 총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덕스러운 말도 없고 아랫사람을 바르게 다스리지도 않았으니, 소인이 군자의 그릇을 탄 것」이라고 했고, 위관은 이를 듣고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가 사과했습니다. 사신은 「위관은 무제의 평상을 쓰다듬었고 장화는 사마륜의 명을 거절했으니, 간언으로는 백옥이 많았고 위태로울 때는 무선이 빛났다」고 평했습니다.
衛瓘撫武帝之床,張華距趙倫之命,進諫則伯玉居多,臨危則茂先為美身為名士,位居總帥,既無德音,又不御下以正,是小人而乘君子之器『삼국연의』 제116~119회
연의에서 위관은 제116회에 종회가 장수들을 모아 영을 내릴 때 감군으로 처음 이름이 나옵니다. 제117회에서는 음평의 다리 어귀를 잃고 제멋대로 군을 낸 제갈서를 종회가 베려 하자, 제갈서가 죄는 있으나 등애가 거느리는 사람이니 장군이 벨 일이 아니고 화목을 다칠까 두렵다며 말립니다. 종회는 제갈서를 함거에 실어 낙양으로 보냅니다.
제118회에서 사마소는 등애에게 제멋대로 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해 먼저 위관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고, 등애가 태위가 되는 조서를 받자 위관은 그 편지를 꺼내 아뢰어 기다리라는 뜻을 전합니다. 등애가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 것이 있다」며 따르지 않자, 사마소는 종회를 사도로 올리고 위관에게 두 갈래 군사를 감독하며 등애를 살피게 합니다.
제119회에서 강유는 종회에게 감군 위관을 먼저 보내 등애를 거두게 하여, 등애가 위관을 죽이면 반역이 드러나니 그때 군사를 일으키라고 권합니다. 위관의 부하들은 이것이 등애에게 장군을 죽이게 하려는 꾀라며 말리지만, 위관은 「내게 꾀가 있다」며 등애만 거두고 나머지는 묻지 않으며 나오지 않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는 격문을 스무 통, 서른 통 돌리고 함거 두 대를 갖추어 밤길로 성도에 갑니다. 닭이 울 무렵 격문을 본 장수들이 모두 그의 말 앞에 와서 절하고, 위관은 수십 명을 이끌고 뛰어들어 「조서를 받들어 등애 부자를 거둔다」고 외칩니다.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진 등애와 뒤따라 나온 등충이 수레에 묶입니다.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자 위관은 호연이 꾸민 꾀를 반기며 군사를 갖추고, 종회와 강유가 죽은 뒤 여러 군사에게 저마다 영채로 돌아가 왕명을 기다리라고 이릅니다. 등애의 부하들이 함거를 쫓아가 그를 빼내려 한다는 말을 듣자 위관은 「등애를 잡은 것은 나이니 그를 살려 두면 나는 묻힐 땅도 없다」고 하고, 강유를 빼앗을 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한을 갚겠다는 호군 전속에게 군사 5백을 주어 면죽으로 보냅니다. 전속은 함거에서 풀려나 성도로 돌아오던 등애를 단칼에 벱니다. 열흘 뒤 가충이 와서 백성을 달래고, 위관은 성도를 지키며 남습니다. 연의에서 위관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위기 · 아우 위실 · 아들 위항 · 위선 등 여섯 · 손자 위개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위관이오. 두 장수의 군을 감독하오.
조서는 한 사람만 거두라 했소. 나머지는 하나도 묻지 않겠소.
말이 막힘이 없구려. 다만 법은 그 말을 따라 주지 않소.
…칼을 무릎에 걸고 밤을 새운 적도 있소. 이쯤은 견디오.
이 자리가 아깝다는 말, 그때도 끝내 다 하지 못했구려.
꾀는 냈으나 깃발을 뺏은 공은 아니오. 사양하겠소.
소인이 군자의 그릇을 탔다더니… 그 말이 맞았구려.
닭이 울기 전에 장수들이 다 내게 왔소.
어지럼증이 도진 척도 이번엔 안 통하는구려.
조서라면… 따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