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윤남(允南) · 미상 (199년 이전) ~ 270년 · 익주 파서군 서충국현 · 유비 휘하
유선에게 항복을 권해 촉의 마지막을 매듭지은 학자
출전 · 『삼국지』 촉서 초주전과 배송지 주의 『촉기』 · 손작과 손성의 논 · 『진양추』 · 진수의 평과 배송지가 끌어온 장번의 말 · 선주전 · 후주전 · 극정전 · 진밀전 · 양희전 · 『진서』 진수전 · 사마표전 · 『화양국지』 유후주지 · 후현지
초주는 자가 윤남이며 파서군 서충국현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자가 영시로 『상서』를 공부하고 여러 경서와 도참에 두루 통했으나 주와 군이 불러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초주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 형과 함께 살았습니다. 자라서는 옛것을 즐기며 배움에 힘써, 집이 가난해도 살림을 묻지 않고 경전을 읽다가 홀로 기뻐 웃으며 먹고 자는 것도 잊었습니다. 육경을 깊이 파고들었고 천문도 꽤 알았으나 거기에 마음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키가 여덟 자에 생김새가 수수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그 자리에서 말로 겨루는 재주는 없었으나 속으로 밝았습니다. 진밀전에 따르면 젊어서는 진밀을 자주 찾아가 그 말을 『춘추연부론』에 적었습니다. 양희전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상일을 맡을 재주가 없다 하여 우러르는 이가 적었으나 양희만은 「우리는 끝내 이 키 큰 아이만 못할 것」이라며 그를 중히 여겼다고 적습니다.
『삼국지』 선주전은 건안 25년(220) 상서로운 조짐을 들어 유비에게 황제에 오르기를 권한 신하들 가운데 그의 이름을 적습니다. 건흥 연간 익주목을 겸한 승상 제갈량이 그를 권학종사로 삼았는데, 배송지 주에 인용된 『촉기』는 그가 처음 제갈량을 뵈었을 때 곁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고, 담당 관리가 웃은 이들을 벌하자고 하자 제갈량이 「나도 참지 못했는데 곁의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하고 말렸다고 전합니다. 건흥 12년(234) 제갈량이 싸움터에서 죽자 초주는 집에서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곧 조문하러 가는 것을 막는 조서가 내렸으나 빨리 떠난 초주만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대장군 장완이 익주자사를 겸하자 전학종사가 되어 주의 학자들을 거느렸고, 연희 원년(238) 후주가 태자를 세우자 태자복을 거쳐 태자가령이 되었습니다. 후주가 자주 나가 노닐고 풍악을 늘리자 그는 광무제가 급하지 않은 나들이를 삼간 일을 들어 「선제의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즐거움을 다할 때가 아니다」라고 상소했고, 중산대부로 옮겨서도 태자를 모셨습니다. 군사가 자주 나가 백성이 지치자 그는 상서령 진지와 그 이해를 논한 뒤 물러나 글로 적었으니, 원수 나라를 논한다는 뜻의 『구국론』입니다.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다투는 이야기에 빗대어, 주 문왕은 백성을 길러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며 지금은 「문왕은 될 수 있어도 한 고조는 되기 어렵다」 하고, 때가 된 뒤에 움직여야지 무력을 다해 정벌을 거듭하다가는 흙더미처럼 무너질 기세가 생긴다고 경계했습니다. 『화양국지』는 이 글을 경요 원년(258)에 적고 사람들이 그 뜻을 살피지 못했다고 합니다. 뒤에 광록대부가 되어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선비의 행실로 예우를 받아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조정이 그에게 물었고 그는 늘 경서에 기대어 답했습니다.
경요 6년(263) 겨울 위의 등애가 음평으로 들어와 곧장 밀고 내려오자, 성을 지킬 채비도 없던 촉의 백성들은 산과 들로 흩어졌습니다. 후주가 신하들을 모았으나 계책이 나오지 않았고, 화친한 오로 달아나자는 말과 험한 남중의 일곱 군으로 가자는 말이 갈렸습니다. 초주만이 「예로부터 남의 나라에 몸을 맡겨 천자가 된 이는 없었다」며,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삼키는 것이 이치이니 위가 오를 삼킬 것이라 같은 신하가 될 바에는 큰 나라에 하는 것이 낫고 두 번 욕보느니 한 번 욕보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남쪽으로 가려면 일찍 꾀했어야 하는데 큰 적이 가까이 와 있으니 떠나는 날 무슨 변이 날지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등애가 항복을 받지 않으면 어찌하느냐는 물음에는, 오가 아직 남아 있으니 받지 않을 수 없고 받으면 예우하지 않을 수 없으며 땅을 떼어 봉하지 않으면 자신이 도성에 가서 다투겠다고 답했습니다. 후주가 여전히 남쪽을 생각하자 그는 다시 상소를 올려, 제갈량의 정벌 뒤에야 겨우 따르며 세금을 원망하는 남쪽 이민족이 궁해서 찾아온 조정을 반드시 저버릴 것이고 북의 군사도 뒤쫓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후주는 마침내 그 계책을 따랐고, 후주전에 실린 항복 글은 시중 장소 · 광록대부 초주 · 부마도위 등량이 인수를 받들고 간다고 적습니다. 극정전은 그 글을 지은 이가 극정이라 합니다. 진수는 「유씨가 근심을 면하고 온 나라가 그 덕을 입은 것은 초주의 꾀였다」고 적었습니다.
배송지는 여기에 손작과 손성의 비판을 붙였습니다. 손작은 천자로서 항복을 빌고 목숨을 청한 것이 얼마나 깊은 부끄러움이냐고 했고, 손성은 나라의 임금은 사직과 함께 죽는 것이 『춘추』의 의리라며 동쪽으로 물러나 뒷날을 꾀할 길도 있었으니 「유선은 어두운 임금이요 초주는 참으로 둔한 신하」라고 했습니다. 배송지가 끌어온 장번은 유선이 나약해 해칠 마음이 없었기에 그 계책이 통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상국 사마소는 나라를 온전히 한 공으로 그를 양성정후에 봉했습니다. 사마소가 다시 부르자 길을 떠났으나 한중에서 병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함희 2년(265) 여름 찾아온 파군의 문립에게 그는 판에 「전오가 문득 가니 월유에 진다」고 써 보였는데, 전오는 사마를, 월유는 8월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해 8월 과연 사마소가 죽었습니다. 진나라가 서자 거듭 부르므로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가서 태시 3년(267) 낙양에 닿았고, 일어나지 못해 머무는 곳에서 기도위를 받았으며 공 없이 봉해졌다며 작위와 땅을 돌려 드리기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태시 5년(269) 본군의 중정 일을 마친 진수가 작별하러 오자, 그는 공자는 일흔둘, 유향과 양웅은 일흔하나에 죽었는데 자신은 일흔을 넘었으니 이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듬해(270) 가을 산기상시가 되었으나 병이 깊어 받지 못하고 그해 겨울 죽었습니다. 배송지 주의 『진양추』는 그가 아들 초희에게 조정이 내린 조복을 몸에 걸치지 말고 가벼운 관을 지으라고 일렀다고 적습니다.
그가 가려 정한 글은 『법훈』 · 『오경론』 · 『고사고』 같은 것 백여 편이고, 『진서』 사마표전은 『고사고』가 사마천의 『사기』의 잘못을 옛 전적으로 바로잡으려 한 글이라고 적습니다. 아들은 초희 · 초현 · 초동 셋이었습니다. 『진서』 진수전은 『삼국지』를 쓴 진수가 젊어서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다 하고, 초주가 그에게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을 이루겠으나 꺾임을 당할 것이니 깊이 삼가라고 일렀는데 뒷날 그 말과 같았다고 적습니다. 『화양국지』는 두진도 그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진수는 평에서 「초주는 말과 이치가 깊고 두루 통해 세상의 큰 선비였으니, 동중서와 양웅의 법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譙周詞理淵通,為世碩儒,有董、揚之規劉氏無虞,一邦蒙賴,周之謀也『삼국연의』 제65회 · 제80회 · 제91회 · 제101~102회 · 제105회 · 제112회 · 제115회 · 제118~119회
연의에서 초주의 이름은 제65회에 처음 나옵니다. 유비가 익주를 얻고 항복한 유장의 문무 관원 예순 남짓을 두루 쓰는데 그 명단에 들어 있습니다. 제80회에서 제갈량이 태부 허정 · 광록대부 초주와 한중왕을 황제로 세우는 일을 의논하자, 초주는 상서로운 바람과 구름, 성도 서북쪽에 수십 길 솟은 누런 기운, 달처럼 밝은 제성을 들어 한중왕이 곧 제위에 올라야 한다고 하고, 즉위하는 날에는 단 위에서 제문을 소리 높여 읽습니다.
연의의 초주는 하늘을 읽는 사람입니다. 제91회에서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자 태사 초주는 밤에 천상을 보니 북방의 기운이 한창 성해 아직 도모할 수 없다며 「승상께서는 천문에 밝으시면서 어찌 억지로 하십니까」 하고 말리지만, 제갈량은 하늘의 도는 늘 바뀐다며 떠납니다. 제101회 끝과 제102회 첫머리에서는 새 떼 수만 마리가 한수에 몸을 던져 죽은 일과 성도 사람들이 들었다는 측백나무의 밤 울음을 들어 다시 북벌을 막아서지만, 제갈량은 헛된 재앙의 조짐 때문에 나라의 큰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답합니다. 제105회에서는 후주가 금병산이 무너지는 꿈을 꾸자 붉은 별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떨어졌으니 승상에게 큰 흉사가 있으리라 풀이하고, 곧 제갈량의 부음이 닿습니다.
제112회에서 중산대부 초주는 강유가 또 군사를 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조정은 술과 여색에 빠져 환관 황호를 믿는데 강유는 군사를 돌보지 않고 싸움만 거듭하니 나라가 위태롭다고 탄식하며 『수국론』 한 편을 지어 강유에게 보냅니다. 강유는 다 읽고 「이는 썩은 선비의 논이다」 하며 땅에 내던집니다. 제115회에서도 서촉의 장수별이 어둡다며 강유를 막으라고 아뢰었다가 후주가 듣지 않자 집으로 돌아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제118회에서 등애가 면죽을 떨어뜨리자 신하들은 남중 일곱 군으로 가자, 오에 의지하자고 합니다. 광록대부 초주는 남만은 오래 등을 돌린 무리로 은혜를 입은 적이 없어 찾아가면 큰 화를 입고, 예로부터 남의 나라에 몸을 맡긴 천자는 없으며 오에 신하가 되었다가 위가 오를 삼키면 두 번 욕을 본다며, 위에 항복하면 땅을 떼어 봉할 것이니 위로 종묘를 지키고 아래로 백성을 편안히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튿날 그가 다시 상소해 후주가 따르려 하자 병풍 뒤에서 나온 북지왕 유심이 「목숨을 아끼는 썩은 선비가 어찌 사직의 큰일을 함부로 논하느냐」고 꾸짖습니다. 후주는 유심을 궁문 밖으로 내쫓고 초주에게 항복 글을 짓게 하며, 초주는 장소 · 등량과 함께 옥새를 받들고 낙성의 등애에게 가서 항복을 청한 뒤 등애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제119회에서는 번건 · 장소 · 극정 등 몇 사람과 함께 낙양으로 옮겨 가는 후주를 따르고, 후주가 안락공에 봉해지자 다른 신하들과 함께 후에 봉해집니다. 연의에서 초주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자 영시) · 어머니 · 형 · 아들 셋(초희 · 초현 · 초동) · 손자 초수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초주가 붓을 들고 왔소.
하늘의 별을 오래 보았소. 사람의 일도 보이오.
듣기 싫은 말을 하는 것이 내 몫이오.
…구국론을 쓰던 밤이 떠오르는구려.
나라가 작고 백성이 지쳤다 하지 않았소.
옳은 말은 늦게라도 값을 받는 법이오.
내 말이 또 늦었구려.
이겨도 나라가 지치면 남는 것이 없소.
그러기에 그만두자 하지 않았소.
백성은 살았소. 그것으로 되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