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陳壽

자 승조(承祚) · 233년 ~ 297년 · 익주 파서군 안한현 · 유비 휘하

진수 초상

방대한 삼국시대의 역사를 집대성하여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역사가

능력치

통솔12무력22지력60정치75매력49

카드

공격력 2체력 1비용 1값어치 5직군 능리
보급 비용 1
다음 국면 지휘력 +2

정사

출전 · 『진서』 진수전과 사신의 평 · 『화양국지』 후현지 진수전 · 『삼국지』 촉서 초주전 · 제갈량전(진수의 표와 평) · 후주전 평과 배송지 주 · 『송서』 배송지전

진수는 자가 승조이며 파서군 안한현 사람입니다.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해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고, 『화양국지』는 그가 『상서』와 『춘추』의 세 전을 익히고 『사기』와 『한서』를 깊이 파고들었으며 총명하고 글이 풍성하고 아름다웠다고 적습니다. 촉에서는 관각영사를 지냈는데, 『화양국지』는 위장군의 주부와 동관비서랑, 산기 · 황문시랑을 지냈다고 적습니다. 환관 황호가 권세를 휘둘러 대신들이 다 뜻을 굽혀 붙었으나 진수만은 굽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여러 번 꾸지람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속의 참군이었는데, 제갈량이 마속을 벨 때 아버지도 연좌되어 머리를 깎이는 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상중에 병이 들어 여종에게 환약을 짓게 했다가 찾아온 손님이 이를 보아 고을에서 그를 나무랐고, 이 일 때문에 촉이 평정된 뒤에도 여러 해 벼슬길이 막혔습니다. 사공 장화가 그의 재주를 아껴, 혐의를 멀리하지 못했으나 사정을 살피면 버려질 정도는 아니라며 효렴으로 천거해 좌저작랑이 되었습니다. 『삼국지』 초주전에는 진수 자신이 태시 5년(269) 본군의 중정이 되어 일을 마치고 돌아가며 초주에게 작별하러 갔다고 적은 대목이 있는데, 이때 초주는 공자는 일흔둘, 유향과 양웅은 일흔하나에 죽었으니 자신도 이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일찍이 초주는 그에게 「그대는 반드시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을 이루겠으나 꺾임을 당할 것이니, 그것이 불행만은 아니다. 깊이 삼가라」고 일렀습니다.

『화양국지』는 그가 앞 사람들의 『파촉기구전』이 오래 전하기에 모자란다며 파와 한중까지 아울러 『익부기구전』 10편을 지었고, 산기상시 문립이 이를 올리자 무제가 좋게 여겼다고 적습니다. 『진서』는 그가 양평령으로 나갔다고 적지만, 『삼국지』 제갈량전에 실린 그의 표는 태시 10년(274) 2월 평양후상 진수의 이름으로 올린 것입니다. 그 표에서 진수는 중서감 순욱과 중서령 화교의 아룀에 따라 제갈량이 남긴 글을 정리해 겹친 것을 덜고 갈래대로 모아 24편으로 엮었다 하고, 제갈량은 군사를 다스리는 데 뛰어났으나 기이한 꾀에는 모자랐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장수의 지략보다 나았다고 썼습니다. 그 뒤 저작랑이 되어 본군의 중정을 겸했습니다.

태강 원년(280) 오가 평정되자 그는 세 나라의 사서를 모아 위 · 오 · 촉 세 책 65편을 짓고 『삼국지』라 했습니다. 위나라 임금은 「태조 무황제」처럼 황제로 높여 적고 유비와 유선은 「선주」 · 「후주」로 적었으며, 후주전의 평에서는 촉이 나라에 사관을 두지 않아 기록을 맡은 벼슬이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가 일을 잘 펼쳐 적어 훌륭한 사관의 재주가 있다고 일컬었고, 마침 『위서』를 짓던 하후담은 그의 글을 보고 제 책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장화는 그를 크게 좋게 여겨 『진서』도 그대에게 맡기겠다고 했고, 『화양국지』는 순욱과 장화가 그의 글을 아껴 반고와 사마천도 견줄 수 없다고 했다고 적습니다. 그는 『고국지』 50편도 지었습니다.

『진서』는 그를 낮춘 말도 함께 전합니다. 위나라에서 이름 높던 정의 형제의 아들에게 쌀 천 섬을 주면 아버지의 좋은 전을 지어 주겠다 했다가 주지 않자 전을 세우지 않았다는 말이 있고, 아버지가 마속의 일로 벌을 받았고 제갈첨도 그를 업신여겼기에 제갈량의 전에서는 장수의 지략이 장점이 아니라 하고 제갈첨은 글씨만 잘해 이름이 실제보다 컸다고 했다 하여, 의논하는 이들이 그를 낮추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배송지 주에는 촉의 사관 상거가 촉 장로들의 말이라며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아전으로 있다가 욕을 당했다고 전한 대목도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지』 제갈량전의 평은 그를 「다스림을 아는 좋은 인재로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고 높인 뒤에, 해마다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때에 맞춰 바꾸는 장수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듯하다고 적었습니다.

장화가 그를 중서랑으로 천거하려 하자 장화를 꺼린 순욱이 그를 미워해 장광태수로 내보내게 했으나, 그는 어머니가 늙었다며 나가지 않았습니다. 『화양국지』는 그의 『위지』가 순욱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습니다. 진남대장군 두예가 형주로 떠나며 다시 그를 천거해 치서시어사가 되었고, 『관사론』 7편 등을 올렸습니다. 어머니의 상으로 물러났는데, 어머니가 낙양에 묻어 달라고 유언해 그대로 따랐다가 고향에 모셔 묻지 않았다 하여 또 나무람을 받았습니다. 두 번 벼슬을 잃고 욕을 본 것이 다 초주의 말과 같았습니다. 몇 해 뒤 태자중서자에 올랐으나 나가지 못했습니다.

원강 7년(297) 병으로 죽으니 나이 예순다섯이었습니다. 양주 대중정 범균 등이 그의 『삼국지』는 권하고 경계하는 말이 많고 잘잘못에 밝아 풍속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며 「글의 화려함은 사마상여만 못하나 바탕의 곧음은 그보다 낫다」며 거두어 달라고 표를 올리자, 조서로 하남윤과 낙양령이 그의 집에 가서 책을 베껴 오게 했습니다. 『화양국지』는 그가 낙양에서 죽었고 자리와 명망이 재주에 미치지 못해 그때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겼다고 적고, 형의 아들 진부도 글재주가 있어 그를 이어 저작좌랑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진서』의 사신은 「앞 시대의 법도를 밝게 이을 수 있는 이는 진수가 그를 얻었는가」라 했고, 찬에서는 진수가 빛나는 글을 품고 우뚝 홀로 섰다고 기렸습니다.

可以繼明先典者,陳壽得之乎
앞 시대의 법도를 밝게 이을 수 있는 이는 진수가 그를 얻었는가『진서』 진수 등 전의 사론
辭多勸誡,明乎得失,有益風化,雖文豔不若相如,而質直過之
권하고 경계하는 말이 많고 잘잘못에 밝아 풍속에 보탬이 되니, 글의 화려함은 사마상여만 못하나 바탕의 곧음은 그보다 낫다『진서』 진수전에 실린 범균 등의 표

삼국지연의

연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종강본 120회 어디에도 진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생애

  1. 263촉이 평정된 뒤 상중의 일로 나무람을 받아 여러 해 벼슬길이 막혔습니다.
  2. 269본군의 중정 일을 마치고 스승 초주에게 작별하러 갔습니다.
  3. 274평양후상으로 제갈량이 남긴 글 24편을 엮어 표와 함께 올렸습니다.
  4. 280오가 평정되자 세 나라의 사서를 모아 『삼국지』 65편을 엮었습니다.삼국의 일을 하나로 엮다
  5. 297예순다섯에 죽자 조서로 그의 집에서 『삼국지』를 베껴 오게 했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아버지(이름 미상 · 마속의 참군) · 조카 진부 · 진리

인연

숙적 싸움터에서 마주치면 서로 공격이 오른다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이 판도 적어 두겠소.

말을 열며

그대의 일은 내 붓이 이미 다 적었소.

되받으며

사관 앞에서는 말을 고르는 것이 좋소.

말문이 막혀

…이 대목은 다시 써야겠군.

말문이 막혀

기록은 지지 않소.

설전을 이기고

역사의 붓은 정확하오.

설전에 지고

오늘 일은… 열전에서 빼겠소.

이긴 뒤

오늘 일은 정사에 남을 것이오.

진 뒤

…진 것도 그대로 적겠소.

쓰러지며

이 시대를 글로 남겨 두었다.

같은 기치 아래

관우제갈량조운장비위연방통장완서서왕평관색마속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