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문희(文姬) · 미상 ~ 미상 · 연주 진류군 어현 · 조조 휘하
흉노에서 열두 해를 보내고 돌아와 그 세월을 시로 남긴 채옹의 딸
출전 · 『후한서』 열녀전 동사의 아내 대목과 이현 주에 인용된 『유동전』 · 『열녀후전』 · 『후한서』 채옹전 · 『삼국지』 위서 동탁전 · 왕찬전 · 종회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박물기』 · 『진서』 후비전 · 양호전
채염은 『후한서』 열녀전에 진류 사람 동사의 아내로 실린 이로, 같은 군 사람 채옹의 딸입니다. 이름은 염이고 자는 문희이며, 이현 주에 인용된 『열녀후전』은 자를 소희라고 적습니다. 학식이 넓고 말재주가 있었으며 음률에도 뛰어났습니다. 이현 주에 인용된 유소의 『유동전』은 채옹이 밤에 거문고를 타다 줄이 끊기자 채염이 「둘째 줄」이라 했고, 채옹이 우연히 맞혔다고 여겨 일부러 줄 하나를 끊고 묻자 「넷째 줄」이라 하여 둘 다 틀리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처음에 하동의 위중도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자식 없이 죽자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채옹은 진류군 어현 사람으로 널리 배워 태부 호광을 섬겼고 음률을 잘 다루었습니다. 희평 4년(175) 경서의 글자를 바로잡아 태학 문밖에 비석으로 세우게 했으나, 광화 원년(178) 조정의 잘못을 봉한 글로 아뢴 것이 새어 나가 미움을 샀고 모함까지 받아 가족과 함께 삭방으로 귀양 갔습니다. 이듬해 사면을 받고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 오 땅으로 달아나 태산의 양씨에게 의지하며 열두 해를 지냈습니다. 중평 6년(189) 동탁의 부름에 마지못해 나섰고 이듬해 좌중랑장으로 헌제를 따라 장안으로 옮겼으며, 초평 3년(192) 동탁이 죽임을 당하자 그 일을 탄식했다가 사도 왕윤에게 잡혀 옥에서 죽었습니다.
흥평 연간(194~195)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채염은 호의 기병에게 사로잡혀 남흉노 좌현왕의 손에 들어갔고, 호의 땅에서 열두 해를 살며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조조는 본디 채옹과 사이가 좋았는데 그에게 뒤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사자에게 금과 옥을 들려 보내 채염을 되사 왔습니다. 채염은 같은 군 사람 동사에게 다시 시집갔습니다.
둔전도위가 된 동사가 법을 어겨 죽을죄를 입자 채염은 조조를 찾아가 빌었습니다. 그때 공경과 이름난 선비, 먼 곳에서 온 사자들이 자리에 가득했는데, 조조는 손님들에게 「채백개의 딸이 밖에 와 있으니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채염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걸어 들어와 머리를 조아려 죄를 빌었고, 목소리와 말이 맑고 또렷하며 뜻이 몹시 슬퍼 모두가 낯빛을 고쳤습니다. 조조가 「참으로 딱하게 여기지만 문서가 이미 떠났으니 어찌하겠소」 하자, 채염은 「공의 마구간에 말이 만 필이요 범 같은 군사가 숲을 이루는데, 어찌 날랜 말 한 필을 아껴 죽어 가는 목숨을 건지지 않으십니까」 하고 답했습니다. 조조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여 뒤쫓아 동사의 죄를 용서했고, 날이 추웠으므로 두건과 신과 버선을 내려 주었습니다.
조조가 이어 옛 책이 많던 집안이니 아직 기억하느냐고 묻자, 채염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이 사천 권 남짓이었으나 떠돌며 모진 고생을 하는 사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외워 기억하는 것은 겨우 사백여 편입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조조가 관리 열 사람을 보내 받아 적게 하겠다고 하자, 채염은 남녀는 예법상 몸소 주고받지 않는다며 종이와 붓만 주면 해서든 초서든 분부대로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적어 보낸 글에는 빠지거나 틀린 곳이 없었습니다.
뒤에 채염은 난리에 떠돈 일을 슬퍼하고 슬픔과 분함을 되새기며 시 두 편을 지었고, 『후한서』는 두 편을 다 싣습니다. 흔히 이 시를 「비분시」라 부릅니다. 첫 편은 동탁이 하늘의 도리를 어지럽혔고 동쪽으로 내려온 그 군사가 모두 호와 강이어서 들판을 휩쓸고 성읍을 에워쌌다고 노래하며, 혈육이 맞으러 와 풀려나게 되었으나 아이들을 버려야 했고 돌아와 보니 집안사람이 다 죽고 없었다고 읊습니다. 뒤 편은 붙잡혀 서쪽 관문으로 들어가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땅에서 호가 소리에 울었고, 떠나는 날 아이가 어미를 부르며 목놓아 울어 귀를 막았다고 읊습니다.
그 뒤의 삶과 죽은 해는 사서에 없고, 진수의 『삼국지』에는 채염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삼국지』 왕찬전은 채옹이 어린 왕찬을 보고 「내 집의 책과 글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했다고 적고, 종회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박물기』는 채옹에게 책이 만 권 가까이 있었는데 말년에 수레 몇 대에 실어 왕찬에게 주었다고 적습니다. 『진서』는 사마사의 아내 경헌황후 양씨와 그 아우 양호의 어머니가 채옹의 딸이라고 적습니다. 범엽은 열녀전 머리말에서 재주와 행실이 특히 빼어난 이를 찾아 실었을 뿐 한 가지 절조에만 매이지 않았다고 밝혔고, 채염은 그 열녀전의 맨 끝에 실렸습니다.
明公廄馬萬匹,虎士成林,何惜疾足一騎,而不濟垂死之命乎家既迎兮當歸寧,臨長路兮捐所生。兒呼母兮號失聲,我掩耳兮不忍聽『삼국연의』 제71회
연의에서 채염은 제71회에 한 번 나옵니다. 건안 23년(218) 가을, 조조가 한중을 구하려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동관을 나서다가 무성한 숲을 보고 어디냐고 묻자, 곁의 사람이 남전인데 숲 사이가 채옹의 장원이고 지금 채옹의 딸 채염이 남편 동사와 함께 산다고 답합니다. 연의는 이어 채염이 본디 위도개의 아내였다가 북쪽에 붙잡혀 가 그곳에서 두 아들을 낳았고 「호가십팔박」을 지어 중원에 퍼졌으며, 조조가 그를 깊이 불쌍히 여겨 천금을 들려 사람을 보내자 좌현왕이 조조의 위세를 두려워해 돌려보냈고, 조조가 그를 동사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풀어 줍니다.
조조는 채옹과의 옛정을 떠올려 군사를 먼저 보내고 가까이 모시는 기병 백여 명만 거느린 채 장원 문 앞에서 말에서 내립니다. 동사는 벼슬살이로 밖에 나가 있어 채염이 홀로 나와 맞이합니다. 조조가 벽에 걸린 비문 두루마리를 보고 묻자 채염은 조아의 비라며 사연을 들려줍니다. 화제 때 상우의 무당 조우가 오월 닷새에 술에 취해 배에서 춤추다 강에 빠져 죽자 열네 살 딸이 강을 돌며 이레 밤낮을 울다 물에 뛰어들었고, 닷새 뒤 아버지의 주검을 업고 떠올랐으며, 상우령 도상이 조정에 아뢰어 효녀로 드러내고 열세 살의 한단순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채염은 아버지 채옹이 이 비를 보러 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둠 속에서 손으로 비문을 더듬어 읽고 그 뒷면에 여덟 글자를 크게 써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 여덟 글자는 「황견유부 외손제구」였습니다. 조조가 뜻을 아느냐고 묻자 채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이지만 저는 참으로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고 답합니다. 모사들 가운데 주부 양수가 뜻을 알았다고 나서자 조조는 말하지 말라며 스스로 생각해 보겠다 하고, 채염에게 작별하고 장원을 나섭니다. 말을 타고 3리를 가서야 깨달은 조조가 양수에게 말해 보라 하니, 양수는 여덟 글자가 「절묘호사」, 곧 더없이 묘하고 좋은 글이라는 뜻의 수수께끼라고 풉니다. 조조는 자기 생각과 꼭 맞는다며 크게 놀라고, 사람들은 양수의 재주를 부러워합니다. 연의에서 채염이 나오는 것은 이 한 대목뿐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채옹 · 첫 남편 위중도 · 남편 동사 · 흉노에서 낳은 두 아들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채옹의 딸 채염이오.
열두 해를 밖에서 살았소. 할 말이 많소.
끊긴 줄 소리도 가려내던 귀요.
…호가 소리를 들으며 두 아이를 두고 왔소.
아버지의 책은 머릿속에 다 있었소.
겪은 자의 말은 무거운 법이오.
글로 적어 두겠소.
겪어 본 자가 견디는 법이오.
이 또한 적어 두겠소.
그 아이들은 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