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완蔣琬

자 공염(公琰) · 미상 ~ 246년 · 형주 영릉군 상향현 · 유비 휘하

장완 초상

제갈량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우며 촉한의 후기를 지탱한 거목

능력치

통솔78무력34지력84정치93매력81

카드

공격력 3체력 4비용 4값어치 13직군 능리
모병 비용 1
소환물 의병 둘을 부른다 (1/1)
동원 비용 4
진영의 장수를 전부 소환한다
회군 비용 2
내 장수 하나를 진영으로 되돌린다 (흉터 없이 · 상처도 씻긴다 · 소환물은 안 된다)

정사

출전 · 『삼국지』 촉서 장완전 · 후주전 · 양의전 · 위연전 · 동윤전 · 조운전과 배송지 주의 『양양기』 · 『익부기구잡기』 · 『위략』 · 『화양국지』 · 오서 반준전 주의 『강표전』 · 『화양국지』 유후주지

장완은 자가 공염이며 영릉군 상향 사람입니다. 스무 살 무렵 외사촌 아우인 천릉의 유민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주의 서좌로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가 광도현장이 되었는데, 유비가 놀러 다니다 갑자기 광도에 이르러 보니 장완은 여러 일을 돌보지 않은 데다 마침 몹시 취해 있었습니다. 크게 노한 유비가 죄를 주어 죽이려 하자 군사장군 제갈량이 「장완은 나라를 떠받칠 그릇이지 백 리 고을을 다스릴 재목이 아닙니다. 그의 정치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겉을 꾸미는 것을 앞세우지 않으니, 주공께서 거듭 살펴 주십시오」 하고 청했고, 제갈량을 존중하던 유비는 죄를 주지 않고 벼슬만 거두었습니다. 얼마 뒤 십방현령이 되었고, 유비가 한중왕이 된 건안 24년(219)에 들어가 상서랑이 되었습니다.

건흥 원년(223) 승상 제갈량이 부를 열자 동조연이 되었습니다. 무재로 천거되자 굳이 남에게 양보했으나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곧 참군이 되었습니다. 건흥 5년(227) 제갈량이 한중에 머물자 장사 장예와 함께 승상부에 남은 일을 맡았고, 230년 장예를 이어 장사가 되고 무군장군을 더했습니다. 제갈량이 여러 번 밖으로 나가 싸우는 동안 장완은 늘 양식과 군사를 넉넉히 대 주었습니다. 제갈량은 늘 「공염은 뜻이 충성스럽고 고아하니 나와 함께 왕업을 도울 사람」이라 했고, 몰래 후주에게 표를 올려 「신이 불행해지면 뒷일은 장완에게 맡기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양양기』는 가정에서 진 마속이 죽은 뒤 한중에 간 장완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선비를 죽이니 아깝지 않습니까」 하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법을 밝게 쓰지 않으면 어찌 적을 치겠느냐고 답했다고 적습니다.

건흥 12년(234) 제갈량이 죽자 장완은 상서령이 되어 나라의 일을 도맡았고, 곧 행도호 · 가절 · 익주자사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장군 · 녹상서사가 되고 안양정후에 봉해졌습니다. 『삼국지』 양의전은 제갈량이 평소 양의의 성미가 좁다 하여 속으로 장완에게 뒤를 맡길 뜻을 두었다고 적습니다. 제갈량이 죽은 직후 위연과 양의가 서로 반역했다는 표를 올리자 장완과 동윤은 후주의 물음에 양의를 믿고 위연을 의심했고, 장완은 숙위하는 여러 군영을 이끌고 북으로 가다가 위연이 죽었다는 소식에 돌아왔습니다. 원수를 막 잃어 나라 안팎이 두려워할 때, 뭇 신하의 윗자리에 선 장완은 슬픈 기색도 기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처신해 사람들이 차츰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익부기구잡기』는 제갈량의 병이 깊을 때 후주가 보낸 이복이 되돌아와 뒷일을 묻자, 제갈량이 「그대가 묻는 사람은 공염이 마땅하다」 하고 그다음은 비의가 이을 만하다고 했으며, 다시 그다음을 묻자 답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동조연 양희는 성품이 간략해 장완이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를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라 헐뜯자 장완은 「사람의 마음은 얼굴처럼 저마다 다르고, 앞에서 따르고 뒤에서 딴말하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일」이라 하고, 양희가 찬성하자니 본심이 아니고 반대하자니 자기 잘못을 드러내게 되어 잠자코 있는 것이니 그것이 양희의 시원스러움이라고 했습니다. 독농 양민이 그를 두고 일하는 것이 흐리멍덩해 앞사람에 못 미친다고 헐뜯었을 때도 장완은 「내가 참으로 앞사람만 못하니 따질 것이 없다」며 벌하지 않았고, 뒤에 양민이 다른 일로 옥에 갇혔을 때도 치우친 마음 없이 대해 양민은 무거운 죄를 면했습니다. 진수는 그의 좋고 싫음이 도리에 맞은 것이 다 이러했다고 적습니다.

연희 원년(238) 후주는 위가 요동과 싸우는 것을 하늘이 준 때라 하며 장완에게 여러 군을 거느리고 한중에 머물다 오가 움직이면 동서에서 함께 치라고 명했고, 장완은 그해 겨울 한중으로 나가 부를 열었으며 이듬해(239) 대사마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갈량이 여러 번 진천을 엿보았으나 길이 험하고 군량 나르기가 어려워 끝내 이기지 못했으니 물길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보고, 배를 많이 만들어 한수와 면수를 따라 위흥과 상용을 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오랜 병이 잇달아 도져 바로 떠나지 못했고, 여러 사람이 이기지 못하면 돌아올 길이 몹시 어려우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후주가 상서령 비의와 중감군 강유 등을 보내 뜻을 전하자, 장완은 한중에 온 지 여섯 해가 되도록 병까지 겹쳐 이룬 것이 없다며 강유를 양주자사로 삼아 황하 서쪽을 누르게 하고 자신은 물길과 뭍길이 사방으로 통하는 부현으로 물러나 뒤를 받치겠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장완은 연희 6년(243) 부현으로 돌아와 머물렀고, 그해 비의가 대장군 · 녹상서사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위의 조상이 흥세로 쳐들어오자 비의가 부절을 받고 나가 막았는데, 『화양국지』는 대사마 장완이 병중이었기 때문이라 적습니다. 장완은 익주자사 자리도 굳이 사양해 비의에게 넘겼고, 병이 점점 깊어져 연희 9년(246) 겨울 11월에 죽었습니다. 시호는 공이며,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은 장완이 죽자 유선이 비로소 몸소 나랏일을 맡았다고 적습니다.

아들 장빈이 뒤를 이어 수무장군 · 한성호군이 되었습니다. 경요 6년(263) 한성에 이른 위의 종회가 부친의 무덤에 가서 소제하고 제사하고 싶다는 글을 보내자, 장빈은 아버지가 병으로 부현에서 죽어 그곳에 묻었다고 답했고 종회는 부현에 이르러 그 말대로 무덤을 찾았습니다. 촉이 항복한 뒤 장빈은 부현에서 종회를 만나 벗의 예로 대접받았으나 이듬해 종회를 따라 성도에 들어갔다가 난병에게 죽었고, 태자복이던 아우 장현도 함께 죽었습니다. 오서 반준전 주의 『강표전』은 오나라 반준이 장완의 이종사촌 아우였다고 적습니다.

촉에서는 시호를 받는 이가 드물었는데, 『삼국지』 조운전은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진 장완과 비의도 시호를 받았다고 적습니다. 『화양국지』는 그 무렵 촉 사람들이 제갈량 · 장완 · 비의 · 동윤을 사상이라 하고 사영이라고도 불렀다고 적습니다. 진수는 「장완은 모나고 반듯하며 위엄과 무게가 있었고, 비의는 너그럽고 두루 사랑했다」고 하고, 둘 다 제갈량이 세운 법도를 이어 고치지 않아 변경에 걱정이 없고 나라가 화목했으나 작은 나라를 다스리고 고요히 지키는 마땅함은 다하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 배송지는 두 사람이 공을 좇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 밖으로 낙곡의 군을 물리치고 안으로 평온을 지켰으니 그 마땅함이 이보다 나을 수 없다며 진수의 흠잡기를 물리쳤습니다.

蔣琬方整有威重,費禕寬濟而博愛,咸承諸葛之成規,因循而不革
장완은 모나고 반듯하며 위엄과 무게가 있었고 비의는 너그럽고 두루 사랑했으며, 둘 다 제갈량이 세운 법도를 이어받아 고치지 않았다『삼국지』 촉서 장완비의강유전 평
蔣琬,社稷之器,非百里之才也。其為政以安民為本,不以修飾為先
장완은 나라를 떠받칠 그릇이지 백 리 고을의 재목이 아니다. 그의 정치는 백성을 편안히 함을 근본으로 삼고 꾸밈을 앞세우지 않는다『삼국지』 촉서 장완전에 실린 제갈량의 말

삼국지연의

『삼국연의』 제63~65회 · 제87~107회

연의에서 장완은 제63회에 처음 나옵니다. 제갈량이 촉으로 들어갈 때 간옹 등과 함께 따르는데, 연의는 그를 자가 공염인 영릉 상향 사람으로 형주와 양양의 이름난 선비이며 그때 서기였다고 소개합니다. 제64회에서 제갈량과 함께 먼저 유비의 장막에 이르러 있고, 제65회에서 익주를 얻은 유비에게 상을 받는 형주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오릅니다. 제87회 남정에서는 참군이 되어 따라가, 제88회에서 여개가 세운 진채가 옛날 선제가 동오에 진 땅의 형세와 같다고 걱정하고, 제89회에서는 맹획이 네 번이나 사로잡혔고 날도 더우니 군을 돌리자고 했다가 제갈량에게 물리침을 당합니다. 제91회 북벌 때는 참군으로 성도에 남아 장예와 함께 승상부의 일을 맡습니다.

제96회에서는 마속을 베려는 순간 성도에서 달려와 크게 외쳐 멈추게 하고, 초나라가 득신을 죽이자 진 문공이 기뻐했다는 옛일을 들어 지혜로운 선비를 죽이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제갈량은 법을 밝게 써야 한다며 마속을 베고 크게 울었고, 장완이 까닭을 묻자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던 선제의 말이 떠올라 운다고 답합니다. 장완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달라는 제갈량의 표를 들고 성도로 가서 후주에게 바칩니다. 제98회에서는 손권이 황제가 되었다는 말에 여러 신하가 동맹을 끊자고 하자 승상에게 물어보자고 하고, 제100회에서는 제갈량을 불러들이려는 후주에게 까닭을 묻습니다. 제101회에서는 환관의 헛소문을 막지 못했다고 제갈량에게 꾸중을 듣고, 거짓을 아뢴 이엄을 베려는 후주에게 선제가 뒷일을 맡긴 신하라며 목숨을 빌어 줍니다.

제104회에서 오장원의 제갈량은 다시 찾아온 이복에게 자신이 죽은 뒤 큰일을 맡을 사람으로 「장공염이 마땅하다」 하고, 그다음은 「비문위가 이을 만하다」고 한 뒤 그다음은 답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둡니다. 제105회에서 위연과 양의가 서로 반역을 고하자 장완은 양의가 성미는 급하나 반역할 사람이 아니고 위연은 평소 공을 믿고 높은 체했다며 양의를 믿고, 제갈량이 반드시 양의에게 남긴 계책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오나라가 파구에 군사를 더하자 왕평과 장억을 영안에 보내고 사신을 보내 속을 떠보자고 하며,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승상 · 대장군 · 녹상서사가 됩니다. 원망을 쏟던 양의를 베려는 후주에게는 공이 많으니 서인으로 내치자고 합니다. 제107회에서 비의가 강유의 출병을 말리며 장완과 동윤이 잇달아 죽어 안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하는 데서 그의 죽음이 전해지고, 연의에서 장완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정사와 연의가 다른 곳

생애

  1. 219광도현장에서 벼슬을 잃었다가 십방현령을 거쳐,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상서랑이 되었습니다.
  2. 223승상 제갈량이 부를 열자 동조연이 되었고, 이어 참군이 되었습니다.
  3. 227제갈량이 한중에 머물자 장예와 함께 승상부에 남은 일을 맡았습니다.
  4. 230장예를 이어 장사가 되고 무군장군을 더해, 싸움에 나선 제갈량에게 양식과 군사를 대 주었습니다.
  5. 234제갈량이 죽자 상서령이 되어 나라의 일을 도맡았고, 슬픈 기색도 기쁜 기색도 없이 사람들을 따르게 했습니다.촉의 사영
  6. 235대장군 · 녹상서사가 되고 안양정후에 봉해졌습니다.
  7. 238후주의 명으로 여러 군을 거느리고 한중으로 나가 부를 열었습니다.
  8. 239대사마가 되었습니다.
  9. 243물길로 상용을 치려던 계책을 병과 반대로 거두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천거한 뒤 부현으로 물러났습니다.
  10. 244병으로 익주자사 자리를 굳이 사양해 비의에게 넘겼습니다.
  11. 246부현에서 병으로 죽었고, 시호는 공입니다.
  12. 263아들 장빈이 한성에서 종회의 글을 받고 아버지의 무덤이 부현에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아들 장빈 · 장현

인연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촉의 장공염이오.

말을 열며

승상의 뒤를 맡은 사람이오. 조용히 갑시다.

되받으며

떠들지 않아도 될 일은 됩니다.

말문이 막혀

…빈자리가 크구려.

말문이 막혀

서두르면 나라가 상하오.

설전을 이기고

지키는 것이 곧 잇는 것이오.

설전에 지고

…내가 승상만 못하구려.

이긴 뒤

뒤를 맡은 값을 했소.

진 뒤

…그분이라면 어찌하셨을까.

쓰러지며

승상의 자리를… 겨우 지켰다.

같은 기치 아래

관우제갈량조운장비위연방통서서왕평관색마속법정이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