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사원(思遠) · 227년 ~ 263년 · 서주 낭야국 양도현 · 유비 휘하
낭야왕의 회유를 뿌리치고 면죽에서 죽은 제갈량의 아들
출전 ·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제갈첨 붙음)과 배송지 주의 간보 · 『화양국지』 · 『진태시기거주』 · 손성 『이동기』 · 촉서 황권전 · 장억전 · 종예전 · 위서 등애전 · 『진서』 진수전
제갈첨은 자가 사원이며 승상 제갈량의 아들입니다. 집안은 낭야 양도의 제갈씨입니다. 『삼국지』에 제 전은 없고 제갈량전 끝에 몇 줄이 붙어 있으며, 배송지 주와 다른 이들의 전에도 그의 일이 흩어져 있습니다. 건흥 12년(234) 무공으로 나아간 제갈량은 형에게 보낸 편지에 「첨이 이제 여덟 살인데 총명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여무는 것이 마음에 걸려 큰 그릇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해 제갈량이 죽자 제갈첨이 아버지의 작위 무향후를 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공주를 아내로 맞고 기도위가 되었으며, 이듬해 우림중랑장이 되었습니다. 이어 사성교위 · 시중 · 상서복야를 거쳤고 군사장군이 더해졌습니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촉 사람들은 제갈량을 그리워했기에 모두 그의 재주를 아꼈고, 조정에 좋은 정사가 있으면 제갈첨이 내놓은 것이 아니어도 백성들이 「갈후가 한 일」이라며 서로 전했습니다. 진수는 그래서 그의 명성이 실제보다 넘쳤다고 적습니다. 장억전에 따르면 오의 태부 제갈각이 위군을 깨뜨린 기세로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장억은 그의 사촌 동생인 시중 제갈첨에게 편지를 보내 태부가 군사를 돌려 농사를 넓히도록 바른말을 올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제갈각은 끝내 이 일로 일족이 멸해졌습니다.
경요 4년(261) 제갈첨은 행도호 · 위장군이 되어 보국대장군 남향후 동궐과 함께 상서의 일을 아울러 맡았습니다. 종예전에 따르면 제갈첨이 처음 조정의 일을 맡자 요화가 종예와 함께 그를 찾아가려 했으나, 종예는 나이 일흔이 넘은 몸이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구하겠다고 문을 두드리겠느냐며 가지 않았습니다. 진수는 제갈첨 · 동궐 · 번건이 일을 맡고 강유가 늘 밖에서 싸우는 동안 환관 황호가 권세를 농락했으나 모두 감싸기만 하고 바로잡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손성의 『이동기』는 제갈첨과 동궐이 싸움만 좋아하고 공이 없는 강유를 불러들여 병권을 거두려 했고, 그를 염우로 바꾸자는 제갈첨의 표가 촉의 노인들 사이에 이야기로 남았다고 적습니다. 또 동진의 상거는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아전으로 있다가 욕을 보았기에 허물을 황호에게 돌렸다는 촉 노인들의 말을 전합니다. 『진서』 진수전도 제갈첨이 진수를 가볍게 여겼고, 진수는 그가 글씨만 뛰어날 뿐 이름이 실제보다 컸다고 적었다고 전합니다.
경요 6년(263) 겨울 위의 정서장군 등애가 음평에서 샛길로 들어오자, 제갈첨은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부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황권전에 따르면 따라간 상서랑 황숭이 서둘러 험한 곳을 차지해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거듭 권하며 눈물까지 흘렸으나 제갈첨은 망설이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봉이 깨지자 그는 면죽으로 물러났습니다. 등애가 「항복하면 반드시 표를 올려 낭야왕으로 삼겠다」는 편지를 보내자 제갈첨은 노하여 그 사자를 베었습니다. 등애전에 따르면 등애의 아들 등충과 사마 사찬이 처음에는 이기지 못하고 물러왔다가 꾸중을 듣고 되돌아가 크게 깨뜨렸고, 제갈첨과 상서 장준 등의 목을 베었습니다. 제갈첨은 싸움터에서 죽었으니 서른일곱이었고 맏아들 제갈상도 함께 죽었습니다. 『화양국지』는 제갈상이 「부자가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입고도 일찍 황호를 베지 못해 나라를 기울게 했으니 살아서 무엇 하랴」 하고 위군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적습니다. 황숭과 이구, 장비의 손자 장준도 이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무리가 흩어지자 등애는 곧장 성도로 나아갔고 후주 유선은 항복했습니다.
함희 원년(264) 둘째 아들 제갈경과 제갈반의 아들 제갈현 등은 하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진의 조서는 「제갈량은 촉에서 마음과 힘을 다했고 그 아들 첨은 어려움에 이르러 의리로 죽었다」고 하였고, 제갈경은 미현의 현령을 거쳐 강주자사에 이르렀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간보는 「제갈첨은 지혜가 위태로움을 붙들기에 모자라고 용기가 적을 막기에 모자랐으나, 밖으로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안으로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충과 효가 거기 있다」고 평했습니다.
瞻雖智不足以扶危,勇不足以拒敵,而能外不負國,內不改父之志,忠孝存焉瞻今已八歲,聰慧可愛,嫌其早成,恐不為重器耳『삼국연의』 제105회 · 제117~118회
연의에서 제갈첨은 제105회에 처음 이름이 나옵니다. 제갈량의 영구가 성도에 이르자 아들 제갈첨이 상을 치릅니다.
큰 장면은 제117회입니다. 등애가 음평을 넘어 부성을 얻자 극정이 무후의 아들을 불러 의논하라고 아뢰고, 연의는 여기서 그를 소개합니다. 어머니 황씨는 황승언의 딸로 얼굴은 못났으나 천문과 지리, 병법에 두루 밝았고, 죽을 때 아들에게 충과 효를 힘쓰라고 일렀다고 합니다. 제갈첨은 어려서 총명해 후주의 딸을 아내로 맞아 부마도위가 되었고 아버지의 무향후를 이었으며, 경요 4년 행군호위장군이 되었으나 황호가 정사를 쥐고 있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주가 세 번 조서를 내려 불러 울며 구해 달라 하자 제갈첨도 울며 성도의 군사를 다 내어 달라 하여 7만을 받고, 열아홉 살 맏아들 제갈상을 선봉으로 삼습니다.
면죽에서 촉군은 팔진을 벌이고 사륜거에 앉힌 제갈량의 나무상을 내세워 사찬과 등충을 놀라 달아나게 하고, 다시 나온 두 사람을 제갈상이 홀로 창을 들고 물리칩니다. 등애가 낭야왕으로 삼겠다는 편지를 보내자 제갈첨은 크게 노해 편지를 찢고 사자를 베어 그 목을 돌려보냅니다. 등애의 복병에 걸려 면죽성으로 물러나 에워싸이자 제갈첨은 팽화를 오에 보내 구원을 청하고, 오주 손휴는 정봉 등을 보냅니다. 구원이 오지 않자 제갈상과 상서 장준에게 성을 맡기고 나가 싸우다 사방에서 쏘는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고, 「내 힘이 다했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습니다. 성 위에서 이를 본 제갈상도 「우리 부자와 조손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며 나가 싸우다 죽고, 등애는 그 충성을 가엾게 여겨 부자를 함께 묻습니다. 장준 · 황숭 · 이구도 나가 싸우다 죽습니다.
제118회 첫머리에서 후주는 면죽을 잃고 제갈첨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랍니다. 연의에서 제갈첨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제갈량 · 맏아들 제갈상 · 둘째 아들 제갈경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제갈첨, 자는 사원이오.
아버지의 이름을 업고 왔으나 이 말은 내 것이오.
이름이 실상을 넘는다 하였소? 오늘 그 말을 거두게 하겠소.
…일찍 여무는 것이 흠이라 하셨지.
부에서 머뭇거린 그 하루가 자꾸 걸리오.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 않았을 뿐이오.
지혜가 모자랐소. 그래도 등은 돌리지 않소.
아버지의 깃발 아래 한 번은 이겼소.
낭야왕은 바라지 않았소. 여기서 끝내겠소.
아버지의 뜻은 저버리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