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미상 · 미상 ~ 272년 무렵 · 양주 회계군 장산현 · 손견 휘하
손호의 독주를 약으로 풀고도 근심 속에 죽은 오의 장수
출전 · 『삼국지』 오서 삼사주전(손휴전 · 손호전)과 배송지 주의 『강표전』 · 오서 손준전에 붙은 배송지 주의 『오서』 · 오서 육개전과 배송지 주의 『오록』 · 오서 왕번전 · 오서 종리목전에 붙은 배송지 주의 『회계전록』 · 『진서』 나헌전
유평은 오나라의 장수로, 자와 태어난 해는 전하지 않습니다. 『삼국지』 오서 손준전에 붙은 배송지 주의 『오서』는 아버지 유찬을 회계군 장산현 사람이라 적고, 끝에 두 아들 유략과 유평이 모두 대장이 되었다고 덧붙입니다. 유찬은 젊어서 군의 아전으로 황건의 우두머리 오환과 싸워 손수 베었으나 한쪽 다리를 다쳐 펴지 못했습니다. 병서와 사서를 즐겨 읽던 그는 칼로 제 힘줄을 끊어 다리를 폈고, 이를 들은 능통의 천거로 쓰였습니다. 싸움에 앞서 머리를 풀고 하늘에 외친 뒤 소리 높여 노래하고 나아가면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봉 2년(255) 손준을 따라 수춘으로 가다가 병이 나서 먼저 돌아오던 길에 위의 장수 장반에게 쫓겨 일흔셋에 죽었습니다.
유평이 사서에 처음 나오는 것은 손휴 때입니다. 영안 6년(263) 겨울 촉이 위의 침공을 알려 오자, 손휴는 대장군 정봉에게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위의 수춘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 유평은 따로 남군의 시적에게 보내 군사를 어디로 낼지 의논하게 했습니다. 모두 촉을 구하려는 것이었으나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닿자 그쳤습니다. 영안 7년(264) 2월에는 정서장군으로서 진군장군 육항, 무군장군 보협, 건평태수 성만과 함께 촉의 파동을 지키던 나헌을 에워쌌습니다. 『진서』 나헌전은 버티는 사이 성안의 절반 넘게 병에 걸렸다고 적습니다. 7월 위의 장군 호열이 보병과 기병 2만으로 서릉을 쳐서 나헌을 구하자 육항 등은 군사를 물렸고, 같은 달 손휴가 죽어 손호가 즉위했습니다.
감로 2년(266) 진에 사신으로 갔던 정충이 돌아오자 손호가 신하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었는데, 상시 왕번이 몹시 취해 엎드렸습니다. 손호는 이를 의심했다가, 술이 덜 깬 왕번의 몸가짐이 태연하자 크게 노해 전각 아래에서 베게 했습니다. 『삼국지』 왕번전은 이때 위장군 등목과 정서장군 유평이 살려 달라고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육개전은 「어떤 이의 말」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보정 원년(266) 12월 육개가 대사마 정봉, 어사대부 정고와 함께 손호가 종묘에 절하러 가는 틈에 그를 폐하고 손휴의 아들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때 좌장군 유평이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서게 되어 있어 육개가 몰래 뜻을 알렸으나, 유평은 거절하면서도 새어 나가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록』은 조금 다르게 적습니다. 손호가 호위를 맡길 사람으로 「유평을 쓰라」 하자 육개는 아들 육위를 보내 유평에게 뜻을 전하게 했는데, 본디 정봉과 사이가 나빴던 유평이 육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멧돼지가 정봉의 진영에 들어왔다니 흉한 징조」라며 기쁜 낯빛을 보여 육위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건형 3년(271) 정월 손호는 어머니와 비빈까지 거느리고 큰 무리를 이끌어 화리로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강표전』에 따르면 이때 만욱이 정봉 · 유평과 몰래, 이 걸음은 급한 것이 아니니 화리에 이르러서도 임금이 돌아가지 않으면 사직의 일이 무거워 자기들끼리라도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의논했습니다. 이 말이 새어 나가자 손호는 그들이 옛 신하라 참으면서 속으로 원한을 품었습니다. 뒤에 모임 자리에서 손호는 만욱에게 독주를 마시게 했으나 술을 따르는 이가 몰래 덜었고, 유평에게도 마시게 했으나 유평은 알아채고 다른 약을 먹어 풀어 죽음을 면했습니다. 만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평은 근심과 울분에 싸여 한 달 남짓 뒤에 역시 죽었습니다. 손호전은 만욱이 꾸지람을 받고 근심하다 죽은 해를 봉황 원년(272)으로 적으니, 유평도 그 무렵 죽었습니다.
진수는 유평의 전을 따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종리목전에 붙은 배송지 주의 『회계전록』에는, 종리목의 아들 종리순이 서릉을 지킬 때 의성과 신릉에 먼저 성을 쌓자고 하자 감군사자 당성이 「시적과 유평은 지략 있는 이름난 장수로 여러 번 그곳을 지났으나 성을 쌓아야 한다고 한 이가 없었다」며 듣지 않았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반년 뒤 진이 과연 신릉에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二子略、平,並為大將又飲留平,平覺之,服他藥以解,得不死『삼국연의』 제120회
연의에서 유평은 마지막 회인 제120회에 이름 한 번 나옵니다. 연의는 손휴가 병으로 죽고 손호가 즉위한 뒤 그의 폭정을 차례로 보입니다. 간하는 복양흥과 장포를 베어 조정의 입을 닫게 하고, 좌승상 육개가 무창 천도를 두고 올린 상소를 물리치고 소명궁을 짓습니다. 국경에서 양호와 맞서던 육항이 아직 진을 칠 때가 아니라는 글을 올리자, 손호는 적과 내통한다며 그의 병권을 빼앗아 사마로 깎습니다. 이어 연의는 손호가 건형으로 연호를 고친 뒤 봉황 원년에 이르기까지 멋대로 굴며 군사를 변경에 묶어 두니 위아래가 모두 원망했다고 적고, 승상 만욱, 장군 유평, 대사농 누현 세 사람이 손호의 무도함을 보고 곧은 말로 간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앞뒤 십여 년 동안 충신 마흔여 명이 죽었고, 손호는 드나들 때마다 철기 5만을 거느려 신하들이 두려워 어찌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연의에서 유평이 나오는 것은 이 한 줄이 전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유찬 · 형제 유략(둘 다 대장이 되었다)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회계의 유평이오.
회계 유찬의 아들이오. 말로도 물러서지 않소.
아버지는 힘줄을 끊고 일어섰소. 그쯤은 견디오.
…파동의 성벽은 끝내 넘지 못했소.
잔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소.
머리 풀고 노래하던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소.
말에는 졌으나 입은 무겁게 지키겠소.
아버지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오.
파동처럼 또 물러서는구려.
근심이 독보다 깊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