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승연(承淵) · 미상 ~ 271년 · 양주 여강군 안풍현 · 손견 휘하
눈 내리는 동흥에서 갑옷을 벗고 위군을 깨뜨리고 손침을 벤 장수
출전 · 『삼국지』 오서 정봉전 · 삼사주전(손량전 · 손휴전 · 손호전)과 배송지 주의 『강표전』 · 육기 『변망론』 · 제갈각전 · 손침전
정봉은 자가 승연이며 여강군 안풍현 사람입니다. 젊어서 날래고 용맹해 소장이 되어 감녕 · 육손 · 반장 등에게 딸렸습니다. 여러 번 정벌을 따라 싸울 때마다 늘 으뜸이었고, 그때마다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았으며 몸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차츰 편장군에 올랐고, 건흥 원년(252) 손량이 즉위하자 관군장군이 되어 도정후에 봉해졌습니다.
그해 겨울 위가 제갈탄 · 호준 등을 보내 동흥을 치자 태부 제갈각이 군을 이끌고 막았습니다. 장수들은 모두 「적이 태부가 몸소 온다는 것을 들으면 뭍에 오르자마자 달아날 것」이라 했으나, 정봉만은 「그렇지 않다. 저들이 나라 안을 움직여 허와 낙양의 군을 다 일으켜 크게 왔으니 반드시 짜 놓은 계획이 있을 것이다. 적이 오지 않으리라 믿지 말고 우리에게 이길 방도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갈각이 뭍에 오르자 정봉은 장군 당자 · 여거 · 유찬 등과 함께 산 서쪽으로 올랐는데, 「여러 군이 느리게 가니 적이 좋은 땅을 차지하면 다투기 어렵다」 하고 여러 군을 비켜 길을 내게 한 뒤 휘하 3천 명을 이끌고 곧장 나아갔습니다. 마침 북풍이 불어 돛을 올리고 이틀 만에 이르러 서당을 차지했습니다. 날이 춥고 눈이 내려 적의 장수들은 술자리를 크게 벌이고 있었는데, 정봉은 그 앞 부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제후의 작위와 상을 얻는 것이 바로 오늘에 달렸다」 하고는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투구만 쓴 채 짧은 병기를 들게 했습니다. 적은 이를 보고 비웃으며 대비하지 않았고, 정봉은 군사를 풀어 쳐서 적의 앞 진영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마침 여거 등이 이르자 위군은 마침내 무너졌습니다. 제갈각전은 위군이 놀라 흩어져 다투어 부교를 건너다 다리가 끊어지자 스스로 물에 뛰어들고 서로 짓밟아, 죽은 자가 수만이었다고 적습니다. 정봉은 멸구장군이 되고 도향후로 올랐습니다.
오봉 2년(255) 위의 장수 문흠이 항복해 오자 정봉은 호위장군이 되어 손준을 따라 수춘으로 맞으러 갔고, 고정에서 뒤쫓아 온 적과 싸웠습니다. 말을 타고 창을 든 채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백의 목을 베고 적의 병기를 거두어 안풍후로 올랐습니다. 손량전은 태평 원년(256) 손침이 정봉 등을 보내 배로 강도에서 여거를 막게 했다고 적습니다. 태평 2년(257) 위의 대장군 제갈탄이 수춘을 들어 항복해 오고 위군이 그를 에워싸자, 오는 주이 · 당자 등을 보내 구하게 하며 정봉에게 여비와 함께 포위를 풀게 했습니다. 정봉은 앞장서 나아가 여장에 주둔하며 힘써 싸운 공으로 좌장군이 되었습니다.
영안 원년(258) 손휴가 즉위하고 장포와 함께 손침을 없앨 일을 꾀할 때, 장포는 「정봉은 글로 하는 관리 일은 못 하지만 계략이 남보다 뛰어나 큰일을 결단할 수 있다」고 천거했습니다. 손휴가 정봉을 불러 「손침이 나라의 위세를 쥐고 법도에 어긋난 일을 하려 하니 장군과 함께 그를 베고자 한다」고 하자, 정봉은 「승상 형제의 무리가 매우 많아 사람들의 마음이 같지 않을까 두려우니 갑자기 누를 수 없습니다. 납일의 모임을 틈타 폐하의 군사로 베어야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손휴가 그 꾀를 받아들여 모임에 손침을 청하자, 정봉과 장포가 좌우에 눈짓해 그를 베었습니다. 손침전은 그해 12월 납일 모임에 손침이 마지못해 들어왔다가 정봉과 장포의 눈짓에 좌우가 그를 묶었고, 손휴가 그를 베었다고 적습니다. 정봉은 대장군이 되고 좌우도호가 더해졌으며, 영안 2년(259) 가절을 받고 서주목을 겸했습니다. 영안 6년(263) 위가 촉을 치자 여러 군을 이끌고 수춘으로 향해 촉을 구하는 형세를 지었다가, 촉이 망하자 군을 돌렸습니다.
영안 7년(264) 손휴가 죽자 정봉은 승상 복양흥 등과 함께 만욱의 말을 따라 손호를 맞아 세웠고, 우대사마 · 좌군사가 되었습니다. 손호전은 원흥 원년(264) 시적과 정봉이 좌우 대사마가 되었다고 적습니다. 보정 3년(268) 손호의 명으로 제갈정과 함께 합비를 쳤는데, 정봉이 진의 대장 석포에게 편지를 보내 이간하니 석포가 조정에 불려 돌아갔습니다. 건형 원년(269) 정봉은 다시 무리를 이끌고 서당을 다스리고 이어 진의 곡양을 쳤으나, 곡양의 백성이 이를 알고 떠나 버려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손호는 노해 정봉의 길잡이를 베었습니다.
정봉은 건형 3년(271)에 죽었습니다. 귀해지고 공이 있자 점점 교만해졌는데, 그를 헐뜯는 이가 있자 손호는 지난날 군을 낸 일을 들추어 그의 집안을 임천으로 옮겼습니다. 이름 글자가 다른 아우 정봉은 후장군에 이르렀으나 형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강표전』에 따르면 손호가 화리로 나갔을 때 만욱 · 정봉 · 유평은 「손호가 화리에 이르러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의 일이 무거우니 스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몰래 꾀했고, 이 말이 새어 손호가 속으로 원한을 품었습니다. 진수는 이 권의 장수들을 「모두 강동의 범 같은 신하」라 평했고, 육기는 『변망론』에서 손호의 초기에 「정봉 · 종리비는 굳센 무용으로 일컬어졌다」고 적었습니다.
丁奉雖不能吏書,而計略過人,能斷大事取封侯爵賞,正在今日『삼국연의』 제38~120회
연의에서 정봉은 제38회에 손권이 얻은 좋은 장수의 하나로 「여강의 정봉」이라 소개됩니다. 제49회에서 동남풍이 불자 주유의 명으로 서성과 함께 제갈량을 없애러 칠성단으로 가는데, 정봉은 뭍길을 맡아 먼저 이르지만 제갈량은 이미 떠난 뒤였고, 조운의 화살에 서성의 배가 멈추자 「제갈량의 신묘한 꾀는 사람이 따를 수 없다」며 돌아섭니다. 이어 주유의 호위로 적벽 싸움에 나서고, 제51회 남군에서는 거짓으로 져서 조인의 장수 우금을 꾀어 에워싸며, 화살에 맞은 주유를 서성과 함께 구합니다. 제55회에서는 서성과 함께 형주로 돌아가는 유비를 길목에서 막다가 손부인의 꾸짖음에 길을 엽니다. 제75~76회 여몽의 형주 습격에도 따르고, 서성과 함께 좌우에서 나와 관우를 에워쌉니다.
제83~84회 이릉에서는 서성과 함께 육손의 호위가 되고, 불길이 오른 날 달아나는 유비의 앞길을 막지만 장포가 유비를 구해 갑니다. 제86회에서 조비가 쳐들어오자 서성의 계책을 받아 군사 3천으로 강을 건넌 손소를 돕고, 회수 가에서 물러나는 조비의 길을 막아 장료의 허리에 화살을 맞힙니다. 장료는 허창으로 돌아가 상처가 터져 죽습니다.
제108회 동흥 싸움에서 평북장군 정봉은 수군 3천을 이끌고 배를 강 위에 한 줄로 늘어세운 뒤 「대장부가 공명을 세우고 부귀를 얻는 것은 바로 오늘」이라며 군사들에게 갑옷과 투구를 벗고 긴 창 대신 짧은 칼만 들게 합니다. 위군은 이를 보고 크게 웃으며 대비하지 않다가, 정봉이 앞장서 뭍으로 뛰어올라 한종을 베고 환가를 쓰러뜨리자 크게 무너지고, 부교가 끊겨 태반이 물에 빠집니다. 이어 제갈각에게 신성을 먼저 치자고 권합니다. 제113회에서는 장포가 손휴에게 「늙은 장수 정봉은 계략이 남보다 뛰어나 큰일을 결단할 수 있다」고 천거하고, 정봉은 납일에 크게 모임을 열어 손침을 불러들이자는 꾀를 내어 그를 없애고 그 형제들을 사로잡아 옵니다. 제117회에는 촉을 구하러 군사 5만의 주장으로 나서 몸소 수춘으로 향하고, 제119회 촉이 망하자 군을 거두어 돌아와 강가에 늘어선 수백 진영을 모두 거느립니다. 제120회에서 손호가 즉위하자 대사마가 되고, 뒤에 진이 오를 칠 무렵 「오의 정봉 · 육항이 모두 죽었다」고 적히는 것으로 연의에서 정봉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우 정봉(이름 글자가 다르다 · 후장군 · 형보다 먼저 죽음)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눈보라쯤이야.
눈보라쯤이야. 웃통 벗고도 이겼소.
추위에 떠는 쪽이 지는 법이오.
…손끝이 시리군.
몸이 데워지면 그때부터요.
동흥의 눈밭을 기억하시오.
칼이 짧았소. 다음엔 더 파고들겠소.
눈보라도 뚫었소.
…갑옷을 도로 입어야겠군.
갑옷을 벗고도 이겼던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