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王昶

자 문서(文舒) · 미상 ~ 259년 · 병주 태원군 진양현 · 사마의 휘하

왕창 초상

법령 개혁을 주장하고 오나라 정벌과 반란 진압에 활약한 위나라의 문무겸비

능력치

통솔74무력64지력79정치80매력75

카드

공격력 4체력 4비용 3값어치 10직군 능리
호위 비용 1
지정한 아군에게 방벽 2와 도발, 퇴각할 때까지

정사

출전 · 『삼국지』 위서 왕창전과 배송지 주의 『왕씨보』 · 『곽림종전』 · 『진서』 · 삼소제기와 배송지 주의 『한진춘추』 · 왕찬전 배송지 주의 『위씨춘추』 · 무제기 · 곽가전 배송지 주 · 오서 주연전 · 삼사주전

왕창은 자가 문서이며 태원군 진양현 사람입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왕씨보』는 그의 백부가 왕유, 아버지가 왕택이라 적고, 『곽림종전』은 두 사람이 어려서 사람을 잘 알아보는 곽태를 찾아가자 곽태가 둘 다 이천석의 재목이라며 왕유는 벼슬로, 왕택은 경학으로 나아가라 일렀다고 전합니다. 왕유는 북중랑장, 왕택은 대군태수에 이르렀습니다. 왕창은 젊어서 같은 군의 왕릉과 함께 이름이 났는데, 왕릉이 나이가 많아 형으로 섬겼습니다.

조비가 동궁에 있을 때 태자문학이 되었다가 중서자로 옮겼습니다. 조비가 즉위하자(220) 산기시랑이 되었다가 낙양전농이 되어, 숲을 이루던 도읍 언저리의 거친 땅을 베어 내고 백성을 부지런히 이끌어 밭을 특히 많이 일구었습니다. 이어 연주자사가 되었고, 명제가 즉위하자(226) 양렬장군이 더해지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밖에 있으면서도 조정을 마음에 두어, 위나라가 진과 한의 폐단을 이어받아 법제가 가혹하고 번잡하니 나라의 법도를 크게 고치지 않고는 다스림을 되살릴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옛 제도를 따르되 시무에 맞는 『치론』 20여 편과, 기병과 정병의 쓰임을 말한 병서 10여 편을 지어 청룡 연간에 올렸습니다. 『삼국지』 왕찬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씨춘추』는 연주자사 왕창이 완적을 만나 하루 내내 말을 나누지 못하고는 탄복하며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했다고 적습니다.

형의 아들과 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겸손하고 실속 있는 뜻을 담아 조카는 묵 · 침, 아들은 혼 · 심이라 하고, 그들에게 경계하는 글을 써 주었습니다. 이 글은 배송지 주에서 『가계』라 불립니다. 그는 자식의 도리는 몸을 보배로 여기고 행실을 온전히 해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고 겉치레와 무리 짓기를 경계했으며, 빨리 이룬 것은 빨리 망하고 늦게 이룬 것은 끝이 좋으니 아침에 핀 풀은 저녁에 지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혹한에도 시들지 않는다고 일렀습니다. 또 제 공을 자랑하면 남을 덮고 뽐내면 남을 업신여기게 되니 굽힘으로 펴고 사양함으로 얻으라 했고, 남이 나를 헐뜯으면 물러나 제 몸을 돌아보라며 「추위를 막는 데는 두꺼운 갖옷만 한 것이 없고, 비방을 그치게 하는 데는 스스로 닦는 것만 한 것이 없다」는 속담을 들었습니다. 사귄 이들을 들어서는 영천의 곽혁과 동평의 유정은 아끼되 아들이 닮기를 바라지 않고, 북해의 서간은 공경해 스승으로 삼기를 바라며, 낙안의 임하는 벗하여 따르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배송지는 옛 벗의 허물을 글로 남긴 것은 옳지 않다고 꼬집었습니다.

청룡 4년(236) 재주와 지혜가 있고 생각이 깊은 이를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씩 천거하라는 조서가 내리자 태위 사마의가 왕창을 천거했습니다. 정시 연간에 서주로 옮겨 무관정후에 봉해지고, 정남장군 · 가절 · 도독형예제군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라에는 늘 있는 군사가 있어도 싸움에는 늘 이기는 법이 없다고 보고, 완은 양양에서 3백여 리나 떨어져 급할 때 서로 구하지 못한다며 치소를 신야로 옮기고 두 주에서 수군을 익히며 둔전을 넓혀 창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가평 원년(249)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고 대신들에게 정치의 득실을 묻자, 왕창은 다섯 가지 일을 올렸습니다. 도를 높이고 학문을 두텁게 해 겉치레를 끊을 것, 시험으로 사람을 가릴 것, 벼슬아치를 한 자리에 오래 두어 공적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높일 것, 관원을 줄이고 녹을 넉넉히 해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게 할 것, 사치를 끊고 검소를 숭상할 것이었습니다. 조서가 이를 기리고 그에게 백관의 고과를 짓게 했습니다.

가평 2년(250) 왕창은 손권이 어진 신하를 내치고 적자와 서자가 다투니 그 틈을 타 오와 촉을 누를 수 있다고 아뢰었습니다. 이에 신성태수 주태가 무 · 자귀 · 방릉을, 형주자사 왕기가 이릉을 치고, 왕창은 강릉으로 가서 대나무 밧줄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넜습니다. 오군이 남쪽 기슭으로 달아났다가 일곱 길로 몰려오자 쇠뇌를 한꺼번에 쏘게 했고, 오나라 대장 시적이 밤에 강릉성으로 들어가자 뒤쫓아 수백 명을 베었습니다. 왕창은 적을 평지로 끌어내려고 먼저 다섯 군을 큰길로 돌려보내 적이 기뻐하게 하고, 거둔 갑옷과 말과 머리를 들고 성을 돌게 해 성나게 한 뒤 복병을 두었습니다. 시적이 과연 쫓아 나오자 그를 이기고 장수 종리무와 허민을 베었습니다. 이 공으로 정남대장군 · 의동삼사가 되고 경릉후에 봉해졌습니다. 『삼국지』 오서 주연전에 실린 시적의 이야기는 왕창이 강릉성을 치다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으며 시적이 기남까지 쫓아가 먼저 이겼다가 뒤에 졌다고 적어 위의 기록과 결이 다릅니다.

가평 4년(252) 겨울 정동장군 호준 · 진남장군 관구검과 함께 오를 쳤는데, 『한진춘추』에 따르면 동쪽의 군이 동관에서 크게 지자 관구검과 왕창은 각기 진영을 불태우고 물러났습니다. 정원 2년(255) 관구검과 문흠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막아 공을 세워 두 아들이 정후와 관내후가 되었고, 그는 표기장군으로 올랐습니다. 감로 2년(257)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협석에 머물며 강릉을 압박해 오나라의 시적과 전희가 동쪽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었습니다. 제갈탄이 죽은 뒤 조서는 손빈이 조나라를 구하려 곧장 대량을 친 일에 견주어 서쪽 군의 진격이 동쪽 원정을 이루게 했다고 기렸고, 그는 식읍이 더해져 4천7백 호가 되고 감로 3년(258) 사공에 올랐습니다. 감로 4년(259)에 죽어 목후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아들 왕혼이 뒤를 이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진서』는 왕혼이 진나라에서 오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사도에 이르렀고, 왕심은 기주자사, 왕담은 여남태수가 되었으며, 그 자손이 대대로 높이 되어 한 시대의 큰 가문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진수는 왕창이 일을 열어 이루는 재주와 식견과 도량을 갖추었다고 평했습니다.

王昶開濟識度
왕창은 일을 열어 이루는 재주와 식견과 도량을 갖추었다『삼국지』 위서 서막 · 호질 · 왕창 · 왕기전 평
救寒莫如重裘,止謗莫如自脩
추위를 막는 데는 두꺼운 갖옷만 한 것이 없고, 비방을 그치게 하는 데는 스스로 닦는 것만 한 것이 없다『삼국지』 위서 왕창전 · 자식에게 남긴 경계의 글

삼국지연의

『삼국연의』 제108회

연의에서 왕창은 제108회에만 나옵니다. 손권이 죽고 어린 손량이 뒤를 잇자 사마사는 오를 치기로 하고, 정남대장군 왕창에게 군사 10만으로 남군을, 정동장군 호준에게 10만으로 동흥을, 진남도독 관구검에게 10만으로 무창을 치게 하며 아우 사마소를 대도독으로 삼아 세 길을 거느리게 합니다. 그해 겨울 10월 오나라 경계에 이른 사마소는 왕창 · 호준 · 관구검을 장막으로 불러 동흥이 가장 긴요한 곳이니 둑과 두 성을 조심하라 이르고, 왕창과 관구검에게 각기 군사 1만을 이끌고 좌우에 벌여 서서 동흥을 얻을 때까지 나아가지 말라고 명합니다. 눈 내리는 날 정봉이 이끄는 오군이 호준의 진영을 덮쳐 위군이 크게 지자, 사마소와 왕창 · 관구검도 동흥의 패전을 듣고 군을 거두어 물러납니다. 연의에서 왕창이 나오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정사와 연의가 다른 곳

생애

  1. 220조비가 즉위하자 산기시랑이 되었다가 낙양전농으로 밭을 많이 일구었습니다.
  2. 226명제가 즉위하자 연주자사로서 양렬장군이 더해지고 관내후가 되었습니다.
  3. 236인재를 천거하라는 조서에 태위 사마의가 그를 천거했습니다.
  4. 249조상이 죽은 뒤 사마의가 득실을 묻자 다스림의 다섯 가지 일을 올렸습니다.
  5. 250강을 건너 강릉을 치고 시적을 성 밖으로 꾀어내 깨뜨렸습니다.강릉으로 내려가다
  6. 251정남대장군이 되고 경릉후에 봉해졌습니다.
  7. 252동관에서 동쪽 군이 지자 관구검과 함께 진영을 불태우고 물러났습니다.
  8. 255관구검과 문흠의 난을 막은 공으로 표기장군이 되었습니다.
  9. 257제갈탄의 난에 협석에 머물며 강릉을 눌러 오군이 동쪽으로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10. 258식읍이 4천7백 호로 늘고 사공에 올랐습니다.
  11. 259세상을 떠나 목후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아버지 왕택 · 백부 왕유 · 아들 왕혼 · 왕심 · 왕담

인연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법대로 하겠소.

말을 열며

법이 서야 나라가 서오. 말에도 법도가 있소.

되받으며

조리 없는 말은 법령보다 쉽게 무너지오.

말문이 막혀

…조문이 하나 어긋났구려.

말문이 막혀

고쳐 쓰면 될 일이오.

설전을 이기고

다스림이란 이런 것이오.

설전에 지고

내 법에 빈틈이 있었구려.

이긴 뒤

기강이 이겼소.

진 뒤

…법령을 더 고쳐야겠구려.

쓰러지며

법령은 고쳐 두었다. 지켜라.

같은 기치 아래

사마의양호곽회사마사사마소왕준손례진태위관왕기가충두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