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간(子幹) · 미상 ~ 미상 (263년 이후) · 양주 회계군 산음현 · 손견 휘하
벼를 다투지 않고 오계를 불 끄듯 평정한 오의 장수
출전 · 『삼국지』 오서 종리목전과 배송지 주의 『회계전록』 · 『속한서』 · 서중의 평 · 오서 손권전 · 손량전 · 손휴전 · 반준전
종리목은 자가 자간이며 회계군 산음현 사람으로, 한나라 노국의 재상을 지낸 종리의의 7대손입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회계전록』은 아버지 종리서가 누선도위였고 형 종리인이 상계리였다고 적습니다. 같은 책에 따르면 종리목은 어려서 굼뜨고 말이 어눌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형 종리인은 늘 사람들에게 「목은 반드시 나보다 나을 것이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렇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젊어서 영흥현으로 옮겨 살며 몸소 밭을 일구어 벼를 스무 무 남짓 심었습니다. 벼가 익을 무렵 현의 백성 하나가 그것을 제 것이라 했고, 종리목은 「본디 밭이 묵어 있어 일구었을 뿐」이라며 벼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현장이 이를 듣고 그 백성을 옥에 가두어 법으로 다스리려 하자 종리목은 그를 위해 청했습니다. 현장은 「그대는 승궁을 사모해 스스로 의로운 일을 하지만, 나는 백성의 주인이니 법으로 아랫사람을 이끌어야 하오」라며 듣지 않았습니다. 배송지 주의 『속한서』는 승궁이 몽음산에서 기른 곡식을 남이 제 것이라 하자 내주고 떠나 이름을 얻은 사람이라고 적습니다. 종리목은 「여기는 같은 군 안이라 그대의 뜻을 보아 잠시 머물렀을 뿐이오. 적은 벼 때문에 이 백성을 죽인다면 무슨 마음으로 더 머물겠소」 하고 짐을 꾸려 산음으로 돌아가려 했고, 현장이 몸소 와서 말리며 갇힌 백성을 풀어 주었습니다. 백성은 부끄럽고 두려워 처자를 이끌고 가져간 벼를 찧어 쌀 예순 곡을 만들어 돌려보냈으나, 종리목은 문을 닫고 받지 않았습니다. 백성이 쌀을 길가에 내다 두었는데 가져가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종리목은 이 일로 이름이 났습니다. 배송지가 실은 서중의 평은 그가 덕 있는 어른의 법도를 밟았다면서도, 덕으로 원한을 갚은 것이라 어짊과 양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적오 5년(242) 낭중에서 태자보의도위가 되었고, 남해태수로 옮겼습니다. 『회계전록』은 남해에서 고량의 도적 우두머리 잉노 등이 백성을 노략하자 군의 경계를 넘어가 쳐서 열흘 만에 항복받았고, 게양현의 도적 우두머리 증하 등 수천 명이 십여 년을 버텨 후작과 비단 천 필을 걸어도 잡지 못했는데 종리목이 사자를 보내 타이르자 모두 스스로 나와 양민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시흥태수 양도는 태상 등윤에게 편지를 보내 「종리자간을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남해에 있는 것을 보니 위엄과 은혜로 군사를 다루고 지혜와 용기가 분명하며 행실이 맑아 옛사람의 풍모가 있다」고 했습니다. 군에 네 해를 있다가 병으로 물러났습니다.
돌아와 승상장사가 되었고 사직을 거쳐 중서령에 올랐습니다. 태원 2년(252) 손권이 죽고 손량이 뒤를 이었습니다. 건안 · 파양 · 신도 세 군의 산민이 난을 일으키자 종리목은 감군사자로 나가 이를 평정했고, 도적의 우두머리 황란 · 상구 등이 제 무리를 내어 병역을 채웠습니다. 『삼국지』 손량전은 태평 2년(257) 8월 파양 · 신도의 백성이 난을 일으키자 정위 정밀, 보병교위 정주와 함께 장군 종리목이 군사를 거느리고 쳤다고 적습니다. 그 뒤 진정후에 봉해지고 월기교위가 되었습니다. 이듬해(258) 손침이 손량을 폐하고 손휴를 세웠습니다.
영안 6년(263) 촉이 위에 병합되자, 촉과 경계를 맞댄 무릉의 오계 오랑캐가 들고일어날까 걱정하는 의논이 일었고, 조정은 종리목을 평위장군으로 삼아 무릉태수를 겸하게 해 군으로 보냈습니다. 위는 한가현장 곽순을 임시 무릉태수로 내세워 부릉의 백성을 이끌고 천릉의 경계로 들어와 적사에 머물게 했습니다. 곽순이 여러 오랑캐의 우두머리를 꾀자 그에 응하는 이가 생겼고 유양현까지 치니 군 안이 떨었습니다. 종리목이 막을 길을 묻자 관리들은 모두 「두 현은 산이 험하고 오랑캐가 군사를 끼고 있으니 군사로 놀라게 해서는 안 되고, 천천히 달래며 은혜와 믿음이 있는 관리를 보내 타일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종리목은 「그렇지 않다. 바깥의 적이 안으로 쳐들어와 백성을 속여 꾀니, 그 뿌리가 깊어지기 전에 쳐서 잡아야 한다. 이는 불을 끌 때 빠름을 귀하게 여기는 형세다」라고 하고, 엄히 채비하게 하며 일을 가로막는 관리는 군법으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무이장군 고상이 「옛날 반 태상은 군사 5만을 거느리고서야 오계의 오랑캐를 쳤습니다. 그때는 유씨와 손을 잡았고 오랑캐들도 교화를 따랐는데, 지금은 그런 도움이 없고 곽순이 이미 천릉을 차지했는데 3천의 군사로 깊이 들어가시니 이로움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렸습니다. 종리목은 「예사롭지 않은 일에 어찌 옛것을 좇겠소」 하고 거느린 군사로 밤낮 길을 재촉해, 험한 산길을 따라 2천 리 가까이 가서 딴마음을 품은 우두머리 백여 명과 그 무리를 베었습니다. 곽순 등이 흩어지고 오계가 평정되었습니다. 이어 공안독 · 양무장군이 되고 도향후에 봉해졌으며, 유수독으로 옮겼습니다. 이듬해(264) 손휴가 죽고 손호가 즉위했습니다.
『회계전록』에 따르면 유수에 있을 때 종리목은 나아가 칠 만하다고 깊이 여겼으나 감히 그 계책을 아뢰지 못하고, 시중 겸 동관령 주육과 잔치를 하다가 크게 탄식했습니다. 주육이 상과 작위가 공에 못 미쳐 한스러워하는 줄 알고 위로하자 종리목은 웃으며 「마원은 사람은 공이 많고 상이 적어야 한다고 했소. 내 공은 적을 만한 것이 없는데 받은 총애는 이미 지나치니 어찌 한하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나라가 자신을 깊이 알아주지 않고 조정 사람들의 해를 입을까 두려워 잠자코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 손권 때 육 승상이 파양을 칠 때 2천의 군사를, 반 태상이 무릉을 칠 때 3천의 군사를 맡았으나 조정이 그를 그곳에 버려두고 뒤를 잇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다시 전장군 · 가절로 무릉태수를 겸했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집에 남은 재물이 없어 선비와 백성이 그를 그리워했고, 아들이 뒤를 이어 군사를 거느렸습니다. 『회계전록』은 둘째 아들 종리성도 공손하고 겸양해 상서랑이 되었고, 그 아우 종리순은 편장군으로 서릉을 지키며 감군사자 당성에게 의성과 신릉에 먼저 성을 쌓아 건평을 돕게 해야 적이 먼저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고 적습니다. 당성은 시적과 유평 같은 명장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따르지 않았는데, 반년 뒤 진이 과연 신릉에 성을 쌓게 했습니다. 진이 오를 평정할 때 종리순은 수군독으로 싸움터에 나가 싸우다 죽었습니다.
진수는 이 권의 신하들이 모두 안의 어려움을 다스려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하고, 「종리목은 덕 있는 어른의 법도를 밟았다」고 평했습니다.
鐘離牧蹈長者之規當及其根柢未深而撲取之,此救火貴速之勢也연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종강본 120회 어디에도 종리목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촉이 망한 뒤 오의 서쪽 경계에서 오계를 평정한 일도 소설은 싣지 않습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종리서 · 형 종리인 · 아들 종리성 · 종리순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무릉태수 종리목이오.
회계 산음의 종리목이오. 내 것이 아니면 다투지 않소.
묵은 밭을 일구었을 뿐, 내 것이라 우기지 않소.
…불은 번지기 전에 꺼야 하오.
예사롭지 않은 일에 옛 법만 좇을 수는 없소.
뿌리가 깊어지기 전에 잡았을 뿐이오.
공은 많고 상은 적어야 한다 했소. 이 패배도 받겠소.
불은 빨리 끄는 것이 귀하오.
삼천으로는 모자랐나 보오.
남길 재물은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