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미상 · 미상 ~ 미상 (229년 이후) · 기주 상산군 진정현 · 유비 휘하
아버지 조운의 뒤를 이어 호분중랑에 오른 맏아들
출전 · 『삼국지』 촉서 조운전과 배송지 주의 『조운별전』 · 후주전 · 강유전 · 『화양국지』 유후주지
조통은 촉의 장수 조운의 아들입니다. 『삼국지』 조운전은 그를 성 없이 「조운의 아들 통」이라고만 적고, 자와 태어나고 죽은 해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조운은 상산 진정 사람으로, 당양 장판에서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달아날 때 어린 아들, 곧 뒷날의 후주를 품에 안고 그 어머니 감부인을 지켜 모두 화를 면하게 했습니다. 건흥 원년(223) 조운은 중호군 · 정남장군이 되어 영창정후에 봉해졌고, 건흥 6년(228) 기곡에서 져 진군장군으로 깎였습니다.
건흥 7년(229) 조운이 죽자 조통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벼슬은 호분중랑에 이르렀고 행영군을 감독했습니다. 둘째 아들 조광은 아문장으로 강유를 따라 답중에 갔다가 싸움터에서 죽었습니다.
경요 4년(261) 봄 3월, 후주는 조운에게 순평후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조운전에 따르면 선주 때에는 법정만 시호를 받았고, 후주 때에도 제갈량 · 장완 · 비의와 총애를 받은 진지, 멀리서 귀순한 하후패만 받았습니다. 그러다 관우 · 장비 · 마초 · 방통 · 황충과 조운이 잇달아 시호를 받으니 당시 여론은 이를 영예로 여겼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에 따르면 후주는 조서에서 「짐이 어려서 험한 길을 지날 때 그의 충성에 기대어 위험을 건넜다」고 했고, 대장군 강유 등은 당양의 싸움에서 그의 의리가 쇠와 돌을 꿰뚫었다고 의논했습니다. 부드럽고 어질며 자애롭고 은혜로운 것을 순, 일을 맡아 차례가 있고 화란을 이겨 평정하는 것을 평이라 하는 시법에 따라 시호를 순평후로 정했습니다.
사서에 남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조통이 언제 죽었는지, 263년 촉이 항복할 때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화양국지』 유후주지도 조운의 시호를 적을 뿐 그 아들들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雲子統嗣,官至虎賁中郎,督行領軍朕以幼沖,涉塗艱難,賴恃忠順,濟於危險『삼국연의』 제97회
연의에서 조통은 제97회에 아우 조광과 함께 한 번 나옵니다. 건흥 6년(228) 가을, 오나라가 조휴를 크게 깨뜨렸다는 글이 오자 제갈량은 장수들을 모아 다시 출병을 의논합니다. 그때 동북쪽에서 큰바람이 일어 뜰 앞의 소나무가 꺾이고, 제갈량은 점을 쳐 큰 장수 하나를 잃을 조짐이라고 합니다. 술자리가 이어지던 중 진남장군 조운의 맏아들 조통과 둘째 아들 조광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 제갈량은 술잔을 땅에 던지며 「자룡이 갔구나」 하고 놀랍니다. 두 아들은 들어와 절하고 울며 아버지가 어젯밤 삼경에 병이 깊어져 죽었다고 아룁니다. 제갈량은 발을 구르며 「자룡이 죽으니 나라는 대들보 하나를 잃고 나는 한 팔을 잃었다」 하고 울고, 장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립니다. 제갈량은 두 아들을 성도로 보내 후주에게 부고를 알리게 합니다.
후주는 「짐이 어렸을 때 자룡이 아니었다면 어지러운 군사 속에서 죽었을 것」이라며 소리 내어 크게 울고, 대장군을 추증하고 순평후라는 시호를 내려 성도 금병산 동쪽에 장사 지내고 사당을 세워 철마다 제사를 올리게 합니다. 이어 조운의 옛 공을 생각해 조통을 호분중랑장으로, 조광을 아문장으로 삼고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게 하니, 두 사람은 사례하고 물러납니다. 연의에서 조통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조운 · 아우 조광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조통이오. 조운의 맏아들이오.
상산 조운의 아들이오. 아버지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말하겠소.
아버지는 장판에서 등을 보이지 않으셨소. 나도 물러서지 않소.
…아버지라면 여기서 어찌하셨을까.
온몸이 담이라던 분의 아들이 이래서야.
아버지께 배운 것은 몸을 삼가는 마음이었소. 오늘도 그뿐이오.
이로움이 없었으니 상도 없소. 아버지 말씀대로요.
아버지의 창끝이 오늘 내 손에 있었소.
이긴 뒤에 상을 받으라 하셨지. 오늘은 없소.
아버지 이름은 더럽히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