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강(子綱) · 미상 ~ 211년 무렵 · 서주 광릉군 · 손견 휘하
상중의 강동을 치려던 조조를 말리고 말릉으로 옮기기를 권한 문신
출전 · 『삼국지』 오서 장굉전과 배송지 주의 『오서』 · 『강표전』 · 『헌제춘추』 · 배송지의 말 · 오서 손파로토역전과 배송지 주의 『오력』 · 『오록』 · 『전략』 · 오주전 · 우번전
장굉은 자가 자강이며 광릉 사람입니다. 젊어서 도읍으로 가서 배웠는데,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서』에 따르면 태학에 들어가 박사 한종을 섬기며 『경씨역』과 『구양상서』를 익혔고, 외황에서 복양개에게 『한시』와 『예기』, 『좌씨춘추』를 배웠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무재로 천거되고 공부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고, 『오서』는 대장군 하진 · 태위 주준 · 사공 순상의 세 부에서 불렀어도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고 적습니다. 그 뒤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습니다.
『오력』에 따르면 손책은 강도에 있을 때 어머니 상중이던 장굉을 여러 번 찾아가 세상일을 물었습니다. 손책이 원술에게 아버지의 군사를 얻어 오와 회계를 차지하고 원수를 갚겠다는 뜻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자, 장굉은 단양에 의지해 오와 회계에서 군사를 모으면 형주와 양주를 하나로 만들고 원수를 갚을 수 있으니 장강에 기대어 한 왕실을 바로잡으라고 권했고, 손책은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우를 그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손책이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자 장굉은 그에게 몸을 맡겨 정의교위가 되었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장굉과 장소는 함께 꾀에 참여해 늘 한 사람은 남아 지키고 한 사람은 싸움을 따랐으며, 서주를 차지한 여포가 장굉을 무재로 천거해 불러가려 하자 손책은 바다가 낳은 진주는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된다며 보내지 않았습니다. 단양을 칠 때 손책이 몸소 진 앞에 나서자, 장굉은 「주장은 꾀가 나오는 곳이고 삼군의 목숨이 걸린 자리이니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간했습니다.
건안 4년(199) 손책은 장굉에게 표를 받들고 허의 궁으로 가게 했고, 장굉은 그곳에 머물러 시어사가 되었으며 소부 공융 등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조조는 먼 곳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그를 연으로 부르고 구강태수로 삼으려 했으나, 장굉은 옛 은혜를 그리워해 병을 핑계로 굳이 사양했습니다. 건안 5년(200) 손책이 죽자 조조가 그 상을 틈타 오를 치려 했는데, 장굉은 남의 상을 틈타는 것은 옛 의리가 아니고 이기지 못하면 원수를 맺고 우호를 버리게 되니 이 기회에 후하게 대하는 것만 못하다고 간했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따라 손권을 토로장군 · 회계태수로 삼았고, 장굉에게 손권을 도와 조정에 붙게 하려고 그를 회계동부도위로 내보냈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손권의 어머니는 장굉에게 아들을 도와 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고, 비밀 계책과 표, 사방과 주고받는 편지는 늘 장굉과 장소가 지었습니다. 『강표전』은 손권이 신하들을 대개 자로 불렀으나 장소만은 장공, 장굉은 동부라 불러 두 사람을 높였다고 적습니다. 『오서』는 또 장굉이 자신을 효렴으로 천거했던 광릉태수 조욱이 착융에게 죽어 대가 끊기자 낭야로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뒤를 세우게 했다고 적습니다. 회계 사람 우번이 비방을 받을 때는 공융에게 편지를 보내 아름다운 보배는 갈고 다듬을수록 빛난다며 그를 감쌌습니다.
뒤에 손권은 장굉을 장사로 삼아 합비 정벌에 데려갔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합비성이 오래 떨어지지 않자 장굉은 옛사람처럼 한쪽을 열어 무리의 마음을 흔들고 조금 늦추어 변화를 보자고 했습니다. 손권이 가벼운 기병을 이끌고 몸소 적에게 돌진하려 하자 장굉은 「장수를 베고 깃발을 뽑는 것은 편장의 소임이지 주장이 할 일이 아니니, 맹분과 하육 같은 용맹을 누르고 패왕의 계책을 품으라」고 간했고, 손권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만두었습니다. 돌아온 이듬해 다시 군사를 내려 하자 장굉은 군사를 쉬게 하고 농사를 넓히며 어진 이를 쓰라고 간해 출병이 멈추었습니다.
장굉은 말릉으로 치소를 옮기라고 권했고 손권은 이를 따랐습니다. 『강표전』에 따르면 장굉은 말릉의 옛 이름이 금릉이고, 진시황 때 망기하는 이가 이 땅에 임금의 도읍이 될 기운이 있다고 해 언덕을 끊고 이름을 고쳤다는 옛이야기를 들어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손권은 뒤에 유비도 같은 말을 하자 「지혜로운 이들의 뜻이 같다」며 그곳에 도읍했다고 합니다. 오주전은 건안 16년(211) 치소를 말릉으로 옮기고 이듬해 석두성을 쌓아 이름을 건업으로 고쳤다고 적습니다. 손권은 장굉에게 오로 돌아가 가족을 맞아 오게 했는데, 장굉은 길에서 병이 들어 죽었으니 나이 예순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아들 장정에게 맡긴 글에서, 임금이 정을 이기지 못해 어진 신하를 쓰지 못하는 것이 다스림이 어그러지는 까닭이니 밝은 임금은 어진 이를 목마른 듯 구하고 간언을 싫증 내지 않으며 정을 누르고 의로써 은정을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손권은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장굉은 시 · 부 · 명 · 뢰 열 편 남짓을 지었습니다. 『오서』에 따르면 북쪽의 진림은 그가 지은 부를 보고 「이것은 내 고향 사람 장자강이 지은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보였고, 장굉에게 보낸 답장에서는 왕랑이 이곳에 있고 그대와 장소가 그곳에 있으니 자신은 큰 무당 앞의 작은 무당이라고 했습니다. 손책이 원술에게 보낸 절교의 편지를 『오록』은 장굉이 지었다고 하고 『전략』은 장소의 글이라 하는데, 배송지는 장소가 이름은 무거워도 글은 장굉만 못하니 장굉이 지은 것이라 보았습니다.
아들 장현은 남군태수와 상서에 이르렀고, 손자 장상은 손호 때 시중 · 중서령이 되었으나 말재주가 손호의 미움을 사 옥에 갇혔다가 끝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수는 「장굉은 글의 이치가 바르고 뜻이 곧아 한 시대의 훌륭한 그릇이었으니, 손책이 그를 장소 다음으로 대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張紘文理意正,為世令器,孫策待之亞於張昭,誠有以也此乃偏將之任,非主將之宜也。願抑賁、育之勇,懷霸王之計『삼국연의』 제15~61회
연의에서 장굉은 제15회에 처음 나옵니다. 주유가 손책에게 「강동의 두 장씨」로 팽성의 장소와 함께 광릉의 장굉을 천거하고, 손책이 몸소 찾아가 맞아들여 그를 참모 정의교위로 삼습니다. 제29회에서는 손책의 사자로 허창에 가서 승전을 아뢰었다가 조조에게 붙들려 머뭅니다. 손책이 죽자 강동을 치려는 조조에게 시어사로서 「남의 상을 틈타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라며 말리고, 조조는 손권을 장군 겸 회계태수로 삼고 장굉을 회계도위로 삼아 인수를 가지고 강동으로 가게 합니다. 강동에 돌아온 장굉은 장소와 함께 정사를 맡고, 손권에게 채옹의 제자 고옹을 천거합니다. 제38회에서는 고옹과 함께 사방에서 오는 빈객을 맞습니다.
제44회에서 장굉은 장소 · 고옹 · 보즐과 함께 파양에서 돌아온 주유를 찾아가고, 장소가 주공께 항복을 권하자고 하자 고옹 등과 함께 모두 뜻이 같다고 합니다. 제53회에서는 합비에서 장료에게 져 송겸을 잃은 손권에게 「장수를 베고 깃발을 뽑는 것은 편장의 소임이지 주공께서 하실 일이 아니다」라며 가볍게 적을 대하지 말라고 간하고, 손권은 제 잘못이라며 고치겠다고 합니다. 제61회에서 장굉은 병을 핑계로 집에 돌아갔다가 죽으며, 말릉의 산천에 제왕의 기운이 있으니 그리로 옮기라는 글을 남깁니다. 손권은 글을 보고 울며 치소를 건업으로 옮기고 석두성을 쌓습니다. 연의에서 장굉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장정 · 장현 · 손자 장상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강동의 붓이 왔소.
도읍 터도 보는 눈이오. 말의 터는 더 잘 보오.
글로 다진 기초는 무너지지 않소.
…문장이 흔들리는군.
퇴고하면 될 일이오.
말릉을 도읍으로 정한 안목이오.
붓이 칼을 못 이겼구려.
붓으로도 이길 수 있소.
…도읍을 옮길 일만 남았구려.
도읍을 옮기라 한 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