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문거(文舉) · 153년 ~ 208년 · 예주 노국 · 한 세력의 주인
조조의 독재에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건안칠자의 명사이자 공자의 후손
출전 · 『후한서』 공융전과 이현 주의 『융가전』 · 공융의 편지 · 『삼국지』 위서 최염전 배송지 주의 『속한서』 · 『구주춘추』 · 장번의 『한기』 · 『위씨춘추』 · 『세어』 · 『삼국지』 위서 순욱전 배송지 주의 『평원예형전』 · 『문사전』 · 왕찬전 배송지 주의 『전론』 · 오서 태사자전 · 촉서 선주전
공융은 자가 문거이며 노국 사람으로, 공자의 20세손입니다. 7대조 공패는 원제의 스승으로 시중에 이르렀고 아버지 공주는 태산도위였습니다. 이현 주에 인용된 『융가전』은 일곱 형제 가운데 여섯째인 그가 네 살 때 형들과 배를 먹을 때마다 작은 것을 집었고, 까닭을 묻자 「저는 어린아이이니 작은 것을 집는 것이 법도」라고 답해 집안에서 남다르게 여겼다고 적습니다. 열 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갔을 때, 이름난 이가 아니면 만나 주지 않던 하남윤 이응의 집에 가서 대대로 사귄 집안의 자제라 했습니다. 무슨 사이냐는 물음에 「선조 공자께서 이 공의 선조 노자와 덕을 같이하며 서로 스승과 벗으로 지냈으니 대대로 사귄 집안」이라 답했고, 뒤에 온 태중대부 진위가 어려서 영리해도 커서 뛰어나란 법은 없다고 하자 「그 말씀대로라면 어르신은 어려서 영리하셨겠습니다」라고 받아쳐 이응을 크게 웃게 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속한서』는 진위의 말을 「어렸을 때 똑똑한 사람이 커서 반드시 뛰어나지는 않다(소시료료)」로 적습니다.
열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슬퍼해 고을에서 그 효를 기렸습니다. 환관 후람에게 쫓기던 산양의 장검이 형 공포를 찾아왔다가 형이 없자, 열여섯 살의 공융은 「형이 없다고 제가 주인 노릇을 못 하겠느냐」며 그를 숨겨 주었습니다. 일이 드러나 형제가 붙잡히자 공융은 숨겨 준 것은 자신이라 했고, 공포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니 자기 죄라 했으며, 어머니까지 집안일은 어른이 맡는다며 나섰습니다. 한 집안이 서로 죽겠다고 다투자 조서는 공포에게 죄를 물었고, 공융은 이 일로 이름을 떨쳐 평원의 도구홍 · 진류의 변양과 나란히 일컬어졌습니다.
사도 양사의 부름을 받고, 대장군이 된 하진에게 축하하러 갔다가 문지기가 제때 들여보내지 않자 명함을 도로 빼앗아 돌아와 스스로 탄핵하고 떠났습니다. 하진의 부하들이 자객을 보내려 하자 어떤 이가 그는 이름이 무거우니 원한을 사면 사방의 선비가 떠난다고 해, 하진은 오히려 그를 시어사로 삼았습니다. 호분중랑장이 된 뒤 동탁이 황제를 갈아 세우자 대답할 때마다 바로잡는 말을 해 동탁을 거슬렀고, 의랑으로 밀려났다가 황건이 가장 거센 북해의 상으로 보내졌습니다.
북해에 이른 공융은 군사를 모아 황건의 장요 등과 싸웠으나 져서 주허현으로 물러났고, 흩어진 백성 4만여 명을 모아 성읍을 다시 세우고 학교를 세웠으며 정현 · 팽구 · 병원 등을 천거했습니다. 황건이 다시 쳐들어오자 도창에 나가 진을 쳤다가 관해에게 에워싸였는데, 그가 일찍이 어머니를 보살펴 준 동래의 태사자가 포위를 뚫고 평원상 유비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유비는 「공 북해가 세상에 유비가 있는 줄을 알더란 말인가」 하며 군사 3천을 보냈고 적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후한서』는 그가 난리를 평정하려는 뜻이 컸으나 재주가 성기고 뜻만 넓어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고, 『구주춘추』는 교령이 우아해 읽을 만했으나 실제로 행하기 어려웠다고 나무랍니다. 유비의 표로 청주자사를 겸했고, 선주전은 도겸이 죽은 뒤 서주를 맡기를 망설이는 유비에게 그가 원술은 「무덤 속의 마른 뼈」라며 맡으라고 권했다고 적습니다. 건안 원년(196) 원담이 봄부터 여름까지 에워싸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공융은 안석에 기대 책을 읽으며 태연히 웃고 이야기했고, 밤에 성이 떨어지자 동산으로 달아났으며 처자는 원담에게 사로잡혔습니다.
헌제가 허에 도읍하자 장작대장으로 불려 소부가 되었고, 조회에서 물음에 답할 때마다 바른 의논을 이끌었습니다. 육형을 되살리자는 의논에 한 번 형을 받으면 다시 착하게 될 길이 막힌다며 반대해 조정이 따랐고, 『속한서』는 조조가 원술과 혼인으로 얽힌 태위 양표를 죽이려 하자 그가 조복도 입지 않고 달려가 「내일이면 옷자락을 걷고 떠나 다시는 조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해 양표를 살렸다고 적습니다. 조비가 원희의 아내 견씨를 맞아들이자 「무왕이 주를 치고 달기를 주공에게 주었다」는 편지를 보내고, 출전을 묻는 조조에게 「지금 일로 헤아려 보니 그랬으리라 여긴 것」이라 답했습니다. 흉년에 싸움이 겹쳐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거듭 편지로 다투었는데, 장번의 『한기』는 그가 걸과 주는 여색으로 나라를 잃었어도 영은 혼인을 막지 않는다고 비꼬았고 조조가 겉으로는 너그러웠으나 속으로는 편치 않았다고 적습니다. 『후한서』는 조조의 속셈이 드러나자 공융이 참지 못해 치우치고 거친 말로 자주 거슬렀다고 적습니다.
어사대부 치려가 조조의 뜻을 헤아려 그를 벼슬에서 물러나게 했고, 한 해 남짓 뒤 태중대부가 되었습니다. 한가한 자리였으나 손님이 날마다 문에 가득해 「자리에 손님이 늘 가득하고 술동이에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평원예형전』은 미움을 받던 예형을 공융만이 높이 사 글을 올려 천거했다고 적고, 『문사전』은 그가 여러 번 예형을 조조에게 천거했으나 예형이 북 치는 관리로 불려 가 조조를 욕보였다고 적습니다.
건안 13년(208) 조조는 군모좨주 노수를 시켜 공융을 탄핵하게 했습니다. 노수의 상주는 그가 북해에서 무리를 모아 딴마음을 품었고, 손권의 사자와 이야기하며 조정을 헐뜯었으며, 조정의 예를 지키지 않았고, 예형과 함께 부모와 자식 사이에 무슨 친함이 있느냐는 방자한 말을 주고받았다며 대역무도라 했습니다. 공융은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으니 나이 쉰여섯이었고 처자도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한서』는 일곱 살 딸과 아홉 살 아들이 바둑을 두다 아버지가 잡혀가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새집이 부서지는데 어찌 알이 깨지지 않겠느냐」고 했고, 끝내 낯빛이 변하지 않은 채 형을 받았다고 적습니다. 『위씨춘추』는 여덟 살 두 아들로 적고, 배송지는 여덟 살 아이가 아버지가 잡혀가는데 태연히 바둑을 두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조비는 공융의 글을 몹시 좋아해 양웅 · 반고의 짝이라 탄복하고 그 글을 바치는 이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으며, 『전론』에서 그를 진림 · 왕찬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 일곱으로 꼽았습니다. 범엽은 논에서 「문거의 높은 뜻과 곧은 마음은 의로운 기개를 움직이고 영웅의 마음을 거스르기에 족했다」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찬탈이 미뤄졌다 하고, 그 바탕을 옥과 가을 서리에 견줄 만하다고 평했습니다.
若夫文舉之高志直情,其足以動義槩而忤雄心坐上客恒滿,尊中酒不空,吾無憂矣『삼국연의』 제5회 · 제11회 · 제20회 · 제22~23회 · 제40회
연의에서 공융은 제5회에 동탁을 치러 모인 제후 가운데 열 번째 진인 북해태수로 처음 나오고, 그의 부장 무안국이 호뢰관 앞에서 여포와 싸우다 손목이 잘립니다. 제11회에서 연의는 그를 공자의 20세손으로, 열 살에 이응을 찾아가 진위의 말을 받아친 아이로 소개하고, 자리에는 손님이 늘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비지 않는 것이 내 바람이라는 말을 옮깁니다. 조조에게 에워싸인 도겸의 부탁을 받고 미축이 오자 공융은 먼저 조조에게 화해를 청하려 하는데, 황건의 관해가 곡식 1만 석을 빌려 달라며 쳐들어옵니다. 「대한의 신하가 대한의 땅을 지키는데 도적에게 줄 곡식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었으나 부장 종보가 관해의 칼에 죽고 성이 에워싸이자, 공융이 어머니를 보살펴 준 은혜를 갚으러 온 태사자가 포위를 뚫고 평원의 유비에게 달려가고, 관우가 관해를 벱니다. 공융은 유비와 함께 서주를 구하러 가지만 조조군이 두려워 멀리 산 아래에 진을 치고, 도겸이 유비에게 서주를 넘기려 하자 원술은 무덤 속의 마른 뼈라며 받으라고 권합니다.
제20회에서는 허도에 있으며 양표를 죽이려는 조조에게 성왕이 소공을 죽이려 한다면 주공이 모른다 할 수 있겠느냐며 말려 양표를 살립니다. 제22회에서 원소의 격문이 오자 원소의 세력이 크니 화친하라고 권했다가 순욱에게 반박당하고, 제23회에서는 유대 · 왕충을 죽이지 말고 한겨울이니 군사는 봄에 일으키라고 조조에게 권합니다. 유표를 달랠 사신으로 뽑히자 「내 벗 예형은 재주가 나보다 열 배」라며 천자에게 표를 올려 예형을 천거하고, 예형이 북을 치다 알몸을 드러내며 조조를 꾸짖자 그를 두둔합니다.
제40회에서 조조가 50만 대군으로 강남을 치려 하자 태중대부 공융은 유비와 유표는 한의 종친이고 손권은 장강의 험함이 있다며 말리다 쫓겨나고, 「지극히 어질지 못한 이가 지극히 어진 이를 치니 어찌 지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합니다. 늘 업신여김을 받던 어사대부 치려가 이 말을 조조에게 전하며 예형과 서로 공자와 안회라 추켜세운 일까지 들추자, 조조는 공융을 잡아 죽이게 합니다. 바둑을 두던 두 아들은 「엎어진 새집 아래 어찌 성한 알이 있겠느냐」며 피하지 않고 함께 죽고, 지습이 시신 앞에서 웁니다. 연의에서 공융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7대조 공패 · 고조부 공상 · 아버지 공주 · 형 공포 · 아들(아홉 살) · 딸(일곱 살)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공자의 후손이오.
네 살에 배를 양보한 이야기, 아시오?
권세 앞이라고 말을 굽히지는 않소.
…또 미움을 샀는가.
그래도 붓은 꺾지 않소.
글과 예는 못 이기는 법이오.
바른말의 값이 목숨이라도 좋소.
바른 말이 이겼소.
…둥지가 깨지면 알도 성치 못하오.
둥지가 깨지면 알도 성치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