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승사(承嗣) · 미상 ~ 256년 · 청주 북해국 극현 · 손견 휘하
손권의 유조를 받았으나 손침에게 삼족이 멸해진 오의 대신
출전 · 『삼국지』 오서 등윤전 · 제갈각전 · 손준전 · 손침전 · 손량전 · 손휴전 · 여범전 · 종실전 손일 · 오부인전 · 배송지 주의 『오서』 · 『오록』 · 『오력』 · 은기 『통어』
등윤은 자가 승사이며 북해국 극현 사람입니다. 큰아버지 등탐과 아버지 등주는 유요와 같은 고장 사람으로 집안끼리 오가던 사이였고,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강을 건너 유요에게 의지했습니다. 손권이 거기장군이 되자 등탐을 우사마로 삼았는데, 너그럽고 후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일찍 죽고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등주는 글을 잘 지어 손권이 손님의 예로 대했고, 군사와 나라의 글과 상소를 늘 그에게 맡겨 고치고 다듬게 했으나 그 역시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손권은 오왕이 되자 옛 은혜를 되짚어 등윤을 도정후에 봉했습니다.
등윤은 젊어서 절개와 지조가 있었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서』는 그가 열두 살에 홀로 남았으나 몸가짐을 닦았고, 정월 하례 때마다 그를 본 대신들이 감탄했다고 적습니다. 스무 살 무렵 공주를 아내로 맞았고, 서른에 처음 벼슬에 나가 단양태수가 되었으며 오군과 회계로 옮겨 가는 곳마다 칭송을 들었습니다. 『오서』는 그가 표를 올려 바로잡은 것이 많았고, 송사를 들을 때는 말을 살피고 낯빛을 보아 사정과 이치를 다하려 했고, 억울하고 괴로운 말을 하는 이가 있으면 마주 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적습니다. 제갈각전에 따르면 손권이 제갈각에게 「그대는 등윤과 견주어 어떠한가」 하고 묻자, 제갈각은 「섬돌을 오르내리며 신을 신는 일은 신이 등윤만 못하고, 산가지를 돌리고 계책을 굴리는 일은 등윤이 신만 못합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손화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은기의 『통어』는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를 두고 조정이 둘로 갈렸을 때, 회계태수 등윤이 육손 · 제갈각 · 고담 · 주거 · 시적 · 정밀 등과 함께 예를 받들어 태자를 섬긴 쪽에 있었다고 적습니다.
태원 원년(251) 손권이 병들자 등윤은 도읍으로 와서 그대로 태상이 되었고, 제갈각 등과 함께 유조를 받아 정사를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제갈각전은 손권이 병이 깊어지자 제갈각 · 손홍과 태상 등윤 · 장군 여거 · 시중 손준을 불러 뒷일을 맡겼다고 적습니다. 이듬해 손권이 죽고 손량이 즉위하자 위장군이 더해졌고, 손량전은 그를 위장군 영상서사로 삼았다고 적습니다.
건흥 2년(253) 제갈각이 온 무리를 들어 위나라를 치려 하자 등윤은 「힘든 부역 뒤에 군사를 일으키면 백성은 지치고 힘이 다했으며 먼 곳의 임금은 대비하고 있습니다. 성을 쳐서 이기지 못하면 앞의 공을 잃고 뒤의 꾸짖음을 부를 것이니, 갑옷을 눌러 두고 군사를 쉬게 하며 틈을 보아 움직이느니만 못합니다」 하고 간했습니다. 제갈각은 듣지 않았고, 등윤을 도하독으로 삼아 도읍에 남은 일을 맡겼습니다. 등윤은 낮에는 손님을 맞고 밤에는 문서를 살펴 때로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 군을 물려 돌아온 제갈각은 손준에게 죽었습니다. 제갈각전은 제갈각이 궁문에 이르러 배가 아프다며 돌아서려 할 때, 손준의 꾀를 모르던 등윤이 「돌아오신 뒤 아직 뵙지 못했고 지금 임금께서 술을 내어 부르시는데 문까지 오셨으니 힘써 들어가셔야 한다」고 했다고 적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력』은 이와 달리 제갈각이 장약 · 주은의 밀서를 등윤에게 보이자 등윤은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제갈각이 「손준 같은 어린 자가 무엇을 하겠소」 하며 들어갔다고 적고, 손성은 두 사람이 가까웠으니 『오력』이 낫다고 보았습니다. 손준이 승상이 되자 등윤은 제갈각의 아들 제갈송의 장인이라며 벼슬을 내놓으려 했습니다. 손준이 「곤과 우의 죄는 서로 미치지 않는데 등후는 어찌 이러시오」 하자, 두 사람은 속으로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서로 품어 주었고, 손준은 그의 작위를 고밀후로 올려 전처럼 함께 일했습니다. 『오록』은 신하들이 등윤을 사도로 올리자 했으나 손준에게 아첨하는 이가 이름 높은 그를 버금 공에 둘 수 없다 하여 막았다고 적습니다.
오봉 2년(255) 손준이 광릉에 성을 쌓으려 하자 신하들은 쌓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두려워 아무도 말하지 못했는데, 등윤만이 말렸습니다. 손준은 듣지 않았고 공사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태평 원년(256) 손준이 문흠의 말을 따라 여거 · 문흠 등을 강도에서 회수와 사수로 보낼 때, 등윤은 손준과 함께 석두까지 나가 전송했습니다. 9월 손준이 죽고 사촌 아우 손침이 뒤를 잇자, 여거는 크게 두려워하여 여러 장수와 이름을 이어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했습니다. 손침은 등윤을 대사마로 삼아 여대를 대신해 무창에 머물게 했습니다. 여거가 군사를 돌리며 등윤에게 사람을 보내 함께 손침을 폐하자고 하자, 손침은 화융 · 정안을 보내 등윤에게 여거를 잡고 빨리 떠나라 일렀습니다. 등윤은 화가 미친 줄 알고 두 사람을 붙잡아 둔 채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켰고, 손침은 등윤이 모반했다고 표를 올리고 장군 유승을 보내 그를 에워싸게 했습니다. 등윤은 거짓 조서를 쓰라는 다그침을 따르지 않은 화융 등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등윤은 낯빛이 변하지 않고 평소처럼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 군사를 이끌고 창룡문으로 가면 장병들이 공이 나온 것을 보고 손침을 버리고 올 것이라 권했으나, 밤이 이미 깊었고 등윤은 여거와 약속한 것을 믿었으며 궁을 향해 군사를 드는 일도 꺼렸습니다. 그는 부곡에게 여후의 군사가 가까운 길에 와 있다고 일렀고, 모두 그를 위해 죽기로 하여 흩어지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밤 큰바람이 불었고 날이 밝도록 여거는 오지 않았습니다. 손침의 군사가 크게 모여 등윤과 장병 수십 명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습니다. 여범전은 여거가 위나라에 항복하라는 권유에 「반역한 신하가 되기 부끄럽다」 하고 스스로 죽었다고 적습니다. 오부인전은 오찬의 아내가 등윤의 딸이어서 함께 해를 입었다고 하고, 종실전은 하구독 손일이 등윤과 여거의 처남이었는데 화가 제게 미칠까 하여 등윤의 아내를 데리고 위나라로 달아났다고 적습니다.
영안 원년(258) 손휴는 손침을 붙잡았을 때 교주로 귀양 보내 달라고 비는 그에게 「그대는 어찌 등윤과 여거를 귀양 보내지 않았소」 하고 꾸짖었습니다. 이어 조서를 내려 제갈각 · 등윤 · 여거가 죄 없이 손준 형제에게 해를 입었으니 마음 아프다 하고 모두 다시 장사 지내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그 일로 멀리 귀양 간 이들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진수는 「등윤은 선비의 지조를 힘써 닦고 법도를 따랐으나, 손준의 때에도 오히려 그 귀함을 지켰으니 반드시 위태로운 이치」라고 평했습니다. 배송지는 손침과 등윤 사이에 본디 틈이 없었으니 그 뜻을 따라 무창으로 나갔다면 화를 면했을 것이라며 슬퍼했습니다.
滕胤厲修士操,遵蹈規矩,而孫峻之時猶保其貴,必危之理也登階躡履,臣不如胤;回籌轉策,胤不如臣『삼국연의』 제108회 · 제111회 · 제113회
연의에서 등윤은 제108회에 태상경으로 처음 나옵니다. 신성에서 지고 돌아온 제갈각이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고 심복 장약 · 주은에게 어림군을 맡기자, 어림군을 빼앗긴 손준이 크게 노합니다. 연의는 이때 본디 제갈각과 틈이 있던 등윤이 틈을 타 손준에게 「제갈각이 권세를 오로지하고 공경을 죽이니 신하답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공은 종실이신데 어찌 일찍 도모하지 않습니까」 하고 부추겼다고 그립니다. 두 사람은 오주 손량에게 들어가 은밀히 아뢰고, 등윤은 「잔치를 열어 제갈각을 부르고 벽에 친 휘장 속에 무사를 숨겼다가 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자리에서 죽이자」는 꾀를 냅니다.
잔칫날 갖은 흉조에 놀란 제갈각이 장약의 말을 듣고 수레를 돌리자, 손준과 등윤이 말을 타고 수레 앞에 와서 「태부는 어찌 돌아가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갈각이 배가 아프다고 하자 등윤은 「조정이 태부께서 군에서 돌아오시고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해 일부러 잔치를 열어 부르고 큰일도 의논하려 합니다. 몸이 편찮으시더라도 애써 가셔야 합니다」 하고 달래 함께 궁으로 들어갑니다. 술이 몇 순배 돈 뒤 손준이 칼을 들고 「천자의 조서로 역적을 벤다」 외치며 제갈각을 벱니다.
제111회에서 손준이 병으로 죽고 사촌 아우 손침이 정사를 보좌하는데, 연의는 손침이 사나워 대사마 등윤과 장군 여거 · 왕돈 등을 죽이고 권병을 모두 쥐었다고 한 줄로 적습니다. 제113회에서 손휴가 잔치 자리에서 손침을 붙잡자 손침은 교주로 보내 달라고 빌고, 손휴는 「너는 어찌 등윤 · 여거 · 왕돈을 귀양 보내지 않았느냐」 꾸짖고 벱니다. 이어 손휴는 해를 입은 제갈각 · 등윤 · 여거 · 왕돈 등의 무덤을 다시 지어 그 충성을 드러냅니다. 연의에서 등윤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등주 · 큰아버지 등탐 · 사위 제갈송(제갈각의 아들) · 오찬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태상 등윤이오.
법도를 지키는 것이 선비의 길이오. 말로 겨뤄 봅시다.
백성이 지쳤소. 그 말부터 들어 보시오.
…밤이 깊었으나 아직 기다리고 있소.
섬돌 오르는 예법만은 남에게 지지 않소.
갑옷을 눌러 두고 틈을 보는 것이 이기는 길이오.
바람이 불고 날이 밝도록 오지 않았구려.
군사를 아낀 덕이오.
궁을 향해 칼을 들 수는 없었소.
여후는 끝내 오지 않았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