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숙자(叔子) · 221년 ~ 278년 · 연주 태산군 남성현 · 사마의 휘하
육항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삼국 통일의 밑그림을 놓은 진의 덕장
출전 · 『진서』 양호전과 사신의 평 · 무제기 · 경헌양황후전 · 두예전 · 왕준전 · 『삼국지』 오서 육항전 · 오주전과 배송지 주의 『진양추』
양호는 자가 숙자이며 태산군 남성현 사람입니다. 『진서』 양호전은 그의 집안이 대대로 녹봉 2천 석의 벼슬을 지냈고 그에 이르기까지 아홉 대가 맑은 덕으로 이름났다고 적습니다. 할아버지 양속은 한나라의 남양태수, 아버지는 상당태수였고, 어머니 쪽으로 채옹의 외손자이며 사마사의 아내 경헌황후의 친동생입니다.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자라서는 널리 배워 글을 잘 지었고, 키가 일곱 자 세 치에 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웠으며 말을 잘했습니다. 군장 하후위가 그를 남다르게 보아 형 하후패의 딸을 아내로 주었습니다. 주와 공부가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고, 왕침과 함께 조상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몸을 맡겨 남을 섬기는 일이 어찌 쉬우랴」 하며 사양했는데, 조상이 무너지자 왕침은 그 옛 아전이라 하여 벼슬을 잃었습니다. 하후패가 촉으로 항복했을 때 인척들이 다 관계를 끊었으나 양호만은 아내를 편안히 하고 예를 더했습니다.
문제 사마소가 대장군일 때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공거로 불려 중서시랑이 되었고, 황문랑으로 옮겼습니다. 진류왕이 서자 관중후가 되었고, 비서감을 거쳐 함희 원년(264) 오등작이 세워지자 거평자에 봉해졌습니다. 종회가 죽은 뒤 상국종사중랑이 되어 기밀을 맡았고, 이어 중령군이 되어 궁궐의 숙위를 거느렸습니다. 함희 2년(265) 무제 사마염이 위의 선양을 받자 중군장군 · 산기상시가 되고 군공에 봉해졌으나 굳이 사양해 후에 머물렀으며, 태시 초에 상서복야 · 위장군이 되었습니다.
무제가 오나라를 없앨 뜻을 품자 태시 5년(269) 그는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어 남쪽으로 나가 진을 쳤습니다. 학교를 열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백성을 달래 강한 지역의 민심을 크게 얻었고, 오나라 사람에게 큰 믿음을 펴서 항복해 온 이가 떠나고자 하면 다 들어주었습니다. 양양에서 7백여 리 떨어진 오의 석성 수비군이 늘 변경을 괴롭히자 꾀를 써서 오가 그 수비를 거두게 했고, 이에 순찰병을 절반으로 줄여 8백여 경의 땅을 개간하게 했습니다. 그가 처음 왔을 때 군에는 백 일 치 군량도 없었으나 말년에는 열 해 치가 쌓였습니다. 진중에서는 가벼운 갖옷에 느슨한 띠를 매고 갑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태시 8년(272) 오의 서릉독 보천이 성을 들어 항복하자 오의 장수 육항이 그를 급히 쳤습니다. 양호는 조서를 받아 군사 5만으로 강릉에 나가고 형주자사 양조를 보내 육항을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보천은 끝내 육항에게 사로잡혔습니다. 8만이 넘는 군사로 3만도 안 되는 적을 두고 강릉에 머물러 있었다는 탄핵을 받아 그는 평남장군으로 깎였습니다. 그 뒤 험한 곳에 다섯 성을 세워 기름진 땅을 거두니 석성 서쪽이 다 진의 땅이 되었습니다. 오나라 사람과 싸울 때는 날을 약속하고 싸웠지 기습하지 않았습니다. 사로잡혀 온 오의 두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더니 뒤에 그 아버지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왔습니다. 오의 땅에서 곡식을 베어 군량으로 쓰면 그만큼 비단으로 갚았고, 사냥은 진의 땅에서만 했으며 오나라 사람이 먼저 맞힌 짐승은 돌려보냈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은 그를 이름 대신 「양공」이라 불렀습니다.
양호는 육항과 마주하며 사신을 오갔습니다. 육항은 양호의 덕과 도량은 악의나 제갈량도 넘지 못한다고 했고, 육항이 병들자 양호가 약을 보냈는데 육항은 「양호가 어찌 사람을 독살할 자인가」 하며 의심 없이 마셨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진양추』는 육항이 술을 보내자 양호도 의심 없이 마셨다고 적습니다. 육항은 늘 수비병들에게 「저들은 오로지 덕을 쓰고 우리는 오로지 사나움을 쓰니, 싸우지 않고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라며 경계만 지키게 했습니다.
양호는 오를 치려면 반드시 상류의 형세를 빌려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동이 칼을 물고 강을 헤엄쳐 건너니, 언덕 위의 짐승은 두렵지 않고 물속의 용만 두렵다」는 오의 동요를 듣고 수군에 공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함녕 초에 익주자사 왕준이 대사농으로 불려 가게 되자 그가 맡길 만한 사람이고 어릴 적 이름도 아동이라 하여 표를 올려 익주에 머물게 하고 몰래 배를 짓게 했습니다. 함녕 2년(276) 정남대장군이 된 그는 상소를 올려, 촉이 평정된 지 열세 해가 지났고 손호의 포악함은 유선보다 심하니 지금 오를 평정해 천하를 하나로 해야 한다며 익주의 군사는 물길로, 형주의 군사는 강릉으로, 동쪽 여러 주의 군사는 말릉으로 함께 나아가는 계책을 아뢰었습니다. 무제는 깊이 받아들였으나 반대하는 의논이 많았고, 양호는 「천하의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늘 열에 일고여덟」이라 탄식했습니다. 이듬해 남성후에 봉하려 하자 그는 굳이 사양했습니다.
그는 좋은 계책과 바른 의논의 초고를 다 태워 세상이 몰랐고, 그가 천거한 이들도 누가 천거했는지 몰랐습니다. 「공적인 조정에서 벼슬을 받고 사사로운 집에 와서 은혜를 사례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습니다. 경치 좋은 날이면 현산에 올라 술을 차려 놓고 읊조렸고, 녹봉은 친족과 군사들에게 나누어 집에 남는 재물이 없었습니다.
함녕 4년(278) 병이 든 그는 조정에 들어와 무제 앞에서 오를 칠 계책을 아뢰었습니다. 무제가 중서령 장화를 보내 계책을 묻자 손호가 죽고 오나라 사람이 어진 임금을 세우면 백만 군사로도 장강을 넘지 못한다고 했고, 장화가 깊이 찬성하자 「내 뜻을 이룰 이는 그대」라 했습니다. 병이 깊어지자 두예를 천거해 자기를 대신하게 하고, 그해 11월 쉰여덟에 죽었습니다. 무제는 흰 옷을 입고 슬피 울었습니다. 형주 사람들은 장날에 부고를 듣고 장을 거두고 거리마다 곡했으며, 오의 변경을 지키던 장병들도 그를 위해 울었습니다. 시중 · 태부로 추증되고 시호는 성입니다. 양양 백성들은 그가 노닐던 현산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철마다 제사했는데, 비석을 바라보는 이마다 눈물을 흘리자 두예가 그 이름을 타루비라 했습니다. 형주 사람들은 그의 이름자를 피해 집을 「문」이라 부르고 호조라는 관청 이름도 사조로 고쳤습니다.
그가 죽은 지 두 해 만인 태강 원년(280) 오가 평정되자, 무제는 잔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는 양태부의 공이다」 하고 그의 사당에 이를 고하게 했으며 부인 하후씨를 만세향군에 봉했습니다. 아들이 없어 태강 2년(281) 형 양발의 아들 양편이 거평후가 되어 뒤를 이었습니다. 『진서』의 사신은 「양공이 오를 평정할 계책을 일으켰으니 그에게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 하고, 남쪽 땅에 큰 믿음을 드리워 한수 가에서 오나라 사람을 기울게 했으면서도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고 평했습니다.
羊公起平吳之策,其見天地之心焉望其碑者莫不流涕,杜預因名為墮淚碑『삼국연의』 제120회
연의에서 양호는 마지막 회인 제120회에 나옵니다. 손호가 육항에게 양양을 엿보게 하자, 가충의 아룀에 따라 사마염이 도독 양호에게 막게 합니다. 양양을 지키는 양호는 항복했다가 떠나려는 오나라 사람을 다 보내 주고, 순찰병을 줄여 8백여 경을 개간해 백 일 치도 없던 군량을 이듬해에 열 해 치로 쌓습니다. 오의 군사가 해이하니 치자는 부장들에게는 육항은 꾀가 많은 장수라며 경계만 지키게 합니다.
사냥 때 경계를 넘지 않고 오나라 사람이 먼저 맞힌 짐승을 돌려보내자, 육항이 오래 묵힌 술을 보내옵니다. 부장 진원이 조심하라고 하지만 양호는 육항은 사람을 독살할 자가 아니라며 그대로 마십니다. 육항이 앓는다는 말에 양호가 지어 둔 약을 보내자 육항도 「어찌 사람을 독살하는 양숙자가 있겠는가」 하고 마시고 이튿날 낫습니다. 손호가 육항의 병권을 빼앗자 양호는 오를 칠 때라며 표를 올리지만 가충 · 순욱 · 풍순이 반대해 무산되고, 「천하의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열에 여덟아홉」이라 탄식합니다.
함녕 4년 조정에 들어온 양호는 손호가 죽고 어진 임금이 서면 오를 얻지 못한다고 아뢰고, 그해 11월 병이 위독해지자 사마염이 친히 그의 집을 찾아옵니다. 양호는 우장군 두예를 천거하고, 천거한 글을 태워 남이 모르게 하는 까닭을 묻자 공적인 조정에서 벼슬을 받고 사사로운 집에서 은혜를 사례하는 것은 취하지 않는다고 답하고 숨을 거둡니다. 남주 백성은 장을 거두고 울었고 강남의 변경 장병도 울었으며, 양양 사람들이 현산에 사당과 비석을 세우니 비문을 보는 이마다 눈물을 흘려 타루비라 불렸다고 연의는 적습니다. 오가 평정된 뒤 사마염은 잔을 들고 울며 「이것은 양태부의 공인데 그가 직접 보지 못해 안타깝다」고 합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양도(후비전은 양신) · 누나 경헌황후 · 아내 하후씨(하후패의 딸) · 이복형 양발 · 뒤를 이은 조카 양편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우되 예를 잃지 마라.
다투기보다 마음을 얻고 싶소.
적이라도 예를 잃지는 않겠소.
…서두르지 말아야 하는데.
때가 아직 익지 않았구려.
덕으로 얻은 것은 무너지지 않소.
…내 대에는 보지 못하겠구려.
이겼으나 자랑할 일은 아니오.
…졌으나 부끄럽지는 않소.
두예에게… 남은 일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