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준王濬

자 사치(士治) · 206년 ~ 286년 · 사례 홍농군 호현 · 사마의 휘하

왕준 초상

익주에서 누선을 지어 장강을 내려가 오나라를 멸한 통일의 마침표

능력치

통솔81무력73지력78정치71매력76

카드

공격력 4체력 5비용 3값어치 11직군 주공
돌파 비용 2
지정한 아군이 한 번 더 공격 · 이번 국면 그 칼은 방벽을 뚫는다 (행동 남은 아군만)

정사

출전 · 『진서』 왕준전과 사신의 평 · 무제기 · 양호전 · 두예전 · 왕혼전 · 오언전

왕준은 자가 사치이며 홍농군 호현 사람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녹봉 2천 석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경전을 널리 읽었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몸가짐을 닦지 않아 고을에서 칭찬받지 못하다가, 늦게야 마음을 고쳐 트이고 너그러우며 큰 뜻을 품었습니다. 집을 지으며 문 앞길을 수십 걸음 넓게 내자 사람들이 지나치다고 했는데, 그는 긴 창과 깃발이 들어올 수 있게 하려 한다 하고 비웃는 이들에게 진승의 말을 빌려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라 했습니다. 하동종사로 불려 가자 청렴하지 못한 수령들이 소문만 듣고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자사 서막이 재주 있는 딸의 짝을 고르려 아전들을 모아 딸이 안에서 보게 하자 딸이 왕준을 가리켰고, 서막은 그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뒤에 군사에 참여했는데 양호가 그를 깊이 알아주었습니다. 양호의 조카 양기가 그는 뜻이 너무 크고 사치스러워 홀로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자, 양호는 「왕준은 큰 재주가 있으니 그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 주면 반드시 쓸 만하다」고 했습니다. 파군태수가 되었을 때 오와 맞닿은 고을이라 군사들이 부역에 시달려 사내아이를 낳아도 기르지 않는 일이 많았는데, 그는 법을 엄하게 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는 집은 부역을 덜어 주어 수천 명을 살렸습니다. 광한태수를 거쳐, 태시 8년(272) 익주의 장홍이 자사 황보안을 죽이자 익주자사가 되어 장홍 등을 다 베고 관내후에 봉해졌습니다. 앞서 그는 들보에 칼 세 자루가 걸리고 한 자루가 더해지는 꿈을 꾸었는데, 주부 이의가 칼 셋은 「주」 자이고 하나를 더했으니 익주에 임할 것이라 풀었다고 합니다. 뒤에 우위장군을 거쳐 대사농이 되었으나, 양호가 그에게 기이한 꾀가 있음을 알고 몰래 표를 올려 그를 익주에 머물게 했습니다.

무제가 오를 칠 계획을 세우고 배를 고치라고 명하자, 그는 큰 배를 이어 붙여 사방 120보에 2천여 명이 탈 수 있게 하고, 나무로 성을 쌓아 망루를 올리고 사방에 문을 내어 그 위에서 말을 달려 오갈 수 있게 했습니다. 뱃머리에는 익새와 괴수를 그려 강의 신을 두렵게 했으니 배의 성대함이 예로부터 없던 것이었습니다. 촉에서 배를 짓느라 깎아 낸 나무 부스러기가 강을 덮고 떠내려가자, 오의 건평태수 오언이 그것을 건져 손호에게 바치며 진이 반드시 오를 칠 것이니 건평의 군사를 늘려야 한다고 했으나 손호는 듣지 않았습니다. 『진서』 오언전은 그 뒤 오언이 스스로 쇠사슬을 만들어 강길을 끊었다고 적습니다. 왕준은 아동의 동요 때문에 용양장군 · 감양익제군사가 되었습니다. 조정의 의논이 다 정벌을 말리자 그는 상소를 올려 「신이 배를 지은 지 일곱 해라 날마다 썩어 가고, 신의 나이 이미 일흔이라 죽을 날이 머지않으니, 셋 가운데 하나라도 어긋나면 도모하기 어렵다」며 때를 놓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태강 원년(280) 정월 왕준은 성도를 떠나 파동감군 당빈과 함께 단양성을 깨뜨렸습니다. 오는 강의 험한 곳마다 쇠사슬을 가로질러 막고 한 길 남짓한 쇠송곳을 물속에 몰래 박아 두었는데, 그는 사방 백여 보의 큰 뗏목 수십 개에 갑옷을 입히고 창을 쥐인 짚 인형을 세워 헤엄 잘 치는 이들에게 앞서 몰게 하니 쇠송곳이 뗏목에 박혀 딸려 갔습니다. 또 길이 열 길 남짓, 둘레 수십 아름의 횃불에 삼씨 기름을 부어 배 앞에 두었다가 쇠사슬을 만나면 태우니 잠깐 사이에 녹아 끊어졌습니다. 2월 서릉을 깨뜨리고 형문 · 이도 · 낙향을 잇달아 떨어뜨렸으며 평동장군 · 도독익량제군사가 되었습니다. 하구와 무창도 버티지 못했고, 배를 저어 곧장 삼산에 이르자 손호가 보낸 유격장군 장상의 수군 1만이 깃발만 보고 항복했습니다. 손호는 항복하는 글을 보냈고, 3월 왕준이 석두성에 들어가자 흰 수레에 흰 말을 타고 손을 뒤로 묶고 구슬을 입에 문 채 관을 수레에 싣는 망국의 예를 갖추어 태자 손근 등 스물한 명과 함께 군문에 나왔습니다. 왕준은 몸소 그 결박을 풀고 구슬을 받고 관을 태운 뒤 그를 서울로 보냈으며, 지도와 문서를 거두고 창고를 봉해 군사들이 사사로이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앞서 조서는 왕준이 건평을 내려가면 두예의 지휘를, 말릉에 이르면 왕혼의 지휘를 받게 했습니다. 두예는 왕준이 건평을 내려가면 물길을 따라 길게 몰아갈 것이니 자기의 지휘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서릉의 왕준에게 곧장 말릉을 치라는 글을 보냈습니다. 말릉 가까이 이르자 왕혼이 잠시 들러 일을 의논하자고 했으나, 그는 돛을 올려 곧장 나아가며 「바람이 좋아 배를 멈출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손호의 중군을 깨뜨리고도 군사를 멈추고 나아가지 않던 왕혼은 부끄럽고 성이 나서 왕준이 조서를 어기고 지휘를 받지 않았다고 아뢰었습니다. 유사가 함거로 그를 불러들이자고 했으나 무제는 허락하지 않고 꾸짖는 조서만 내렸고, 왕준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변호했습니다. 왕혼 쪽이 다시 그의 군사가 오의 보물을 차지했다고 아뢰자, 왕준은 군기를 엄하게 해 백성의 것을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고 어긴 자 열세 명을 베었다고 맞섰습니다.

서울에 이르자 유사가 다시 대불경으로 정위에게 넘기자고 했으나, 무제는 한 번의 허물로 정벌의 공을 가릴 수 없다며 그를 보국대장군으로 삼고 양양현후로 봉해 1만 호를 주었으며, 아들 왕이를 양향정후에 봉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제 공은 큰데 왕혼 부자와 권세가에게 눌린다고 여겨, 무제를 뵐 때마다 싸운 공과 억울함을 늘어놓다가 성이 나서 인사도 없이 나가기도 했습니다. 외척 범통이 돌아온 뒤로는 오를 평정한 일을 입에 올리지 말고 누가 물으면 성주의 덕과 장수들의 힘이라 하라고 권하자, 그는 처음에 등애의 일처럼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의 공은 큰데 보답이 가볍다고 여겼고, 무제는 그를 진군대장군 · 산기상시로 올렸습니다. 오를 평정한 뒤로 그는 예전처럼 검소하게 지내지 않고 좋은 음식과 비단옷으로 사치를 부렸으며, 부르는 이는 대개 촉 사람이라 옛 사람을 버리지 않음을 보였습니다.

태강 6년(285) 무군대장군 · 개부의동삼사가 되었고, 그해 12월 여든의 나이로 죽었으니 서력으로는 286년 초입니다. 시호는 무이고 백곡산에 묻혔으며, 아들 왕구가 뒤를 이었습니다. 『진서』의 사신은 오를 친 싸움에 장수는 많았으나 오를 평정한 공은 왕혼과 왕준이 으뜸이라 하면서도, 공을 자랑하고 기세를 부려 서로 헐뜯은 것을 안타까워했고, 찬에서는 「왕혼은 착한 이를 해쳤고 왕준은 공을 자랑했다」고 적었습니다.

于時討吳之役,將帥雖多,定吳之功,此焉為最
그때 오를 친 싸움에 장수는 많았으나, 오를 평정한 공은 이 둘이 으뜸이다『진서』 왕혼 · 왕준전 사신의 평
濬舉帆直指,報曰:「風利,不得泊也。」
왕준은 돛을 올려 곧장 나아가며 「바람이 좋아 배를 멈출 수 없다」고 답했다『진서』 왕준전

삼국지연의

『삼국연의』 제120회

연의에서 왕준은 마지막 회인 제120회에 나옵니다. 육항과 정봉이 죽은 뒤 익주자사 왕준은 손호가 거칠고 포악하니 서둘러 쳐야 한다며, 손호가 죽고 어진 임금이 서면 강한 적이 되고 배를 지은 지 일곱 해라 날로 썩으며 자신의 나이 일흔이라 죽을 날이 머지않으니 때를 놓치지 말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사마염은 왕공의 의논이 양도독과 꼭 맞는다며 마음을 정하지만 왕혼의 아룀으로 한때 멈췄다가, 두예의 표가 이르자 용양장군 왕준과 광무장군 당빈에게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게 합니다.

손호가 근심하자 환관 잠혼이 강의 요해마다 쇠사슬을 가로질러 걸고 쇠송곳 수만 개를 물속에 두자고 합니다. 왕준은 이를 듣고 크게 웃으며 큰 뗏목 수십 개에 갑옷 입고 창을 든 짚 인형을 세워 물길에 띄우니, 오의 군사는 산 사람으로 알고 달아나고 쇠송곳은 뗏목에 박혀 딸려 갑니다. 또 뗏목 위에 길이 열 길 남짓의 횃불을 만들어 삼씨 기름을 부어 두었다가 쇠사슬을 만나면 태워 잠깐 사이에 끊습니다. 삼산을 지날 때 사공이 바람과 물결이 거세니 기다리자고 하자 칼을 뽑아 꾸짖고 북을 울려 나아가고, 오의 장수 장상이 항복해 석두성의 문을 열어 줍니다. 손호는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수레에 실어 왕준의 군문에 나와 항복하고, 왕준은 결박을 풀고 관을 태우며 왕의 예로 대합니다. 연의는 여기에 왕준의 누선이 익주를 내려오니 금릉의 왕기가 어둡게 거두어졌다는 당나라 사람의 시를 붙입니다. 왕준은 손호를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가고, 사마염은 그를 보국대장군에 봉합니다.

정사와 연의가 다른 곳

생애

  1. 272장홍이 자사 황보안을 죽이자 익주자사가 되어 장홍 등을 베었습니다.
  2. 280성도를 떠나 뗏목과 횃불로 쇠송곳과 쇠사슬을 걷어내고 강을 내려갔습니다.오를 무너뜨린 두 사람
  3. 280석두성에 들어가 망국의 예를 갖춘 손호의 항복을 받았습니다.진의 통일
  4. 280왕혼의 탄핵을 받았으나 보국대장군 · 양양현후가 되었습니다.
  5. 285무군대장군 · 개부의동삼사가 되었습니다.
  6. 286태강 6년 12월, 서력으로 286년 초에 여든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아내 서씨(서막의 딸) · 아들 왕구 · 왕창 · 왕이 · 손자 왕수(왕창의 아들)

인연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익주에서 배를 몰고 왔소.

말을 열며

장강을 따라 내려가면 될 일이오.

되받으며

배는 이미 다 지어 두었소.

말문이 막혀

…쇠사슬에 걸렸는가.

말문이 막혀

물길이 막히는군.

설전을 이기고

쇠사슬도 뗏목의 불에는 녹소.

설전에 지고

…공을 다투다 일을 그르치겠구려.

이긴 뒤

물길을 끝까지 갔소.

진 뒤

…물길이 막혔군.

쓰러지며

누선이 강을 내려갔으니 됐다.

같은 기치 아래

사마의양호곽회사마사사마소손례진태위관왕기왕창가충두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