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충賈充

자 공려(公閭) · 217년 ~ 282년 · 평양군 양릉현 · 사마의 휘하

가충 초상

조모를 찌르게 하고도 사마씨를 도와 진나라 개국공신이 된 권신

능력치

통솔54무력31지력89정치85매력9

카드

공격력 3체력 3비용 3값어치 10직군 모사
천운 비용 3
장수 하나의 공격력과 체력을 무작위로 다시 정한다
파적 비용 4
적 전체의 방벽과 걸린 이로운 것을 걷는다

정사

출전 · 『진서』 가충전 · 경제기 · 문제기 · 무제기 · 후비전 · 『삼국지』 위서 가규전과 배송지 주의 『진제공찬』 · 위서 삼소제기와 배송지 주의 『한진춘추』 · 『위말전』

가충은 자가 공려이며 평양군 양릉현 사람입니다. 아버지 가규는 위의 예주자사 · 양리정후로, 늦게야 그를 얻고 뒷날 집안의 문을 가득 채울 경사가 있으리라 하여 그 뜻으로 이름과 자를 지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상을 치르며 효로 이름났고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습니다. 상서랑으로 법령을 다듬고 재정과 관리의 고과를 맡았는데 그가 가른 법도는 다 쓰였고, 황문시랑 · 급군 전농중랑장을 거쳤습니다.

정원 2년(255) 대장군 사마사의 군사에 참여해 낙가에서 관구검 · 문흠을 치는 데 따랐고, 사마사가 병이 깊어 허창으로 돌아가자 남아 여러 군을 감독했습니다. 뒤에 사마소의 대장군사마 · 우장사가 되었습니다. 갓 조정을 쥔 사마소가 지방 장수들의 딴마음을 걱정하자, 그는 오를 칠 일을 핑계로 제갈탄을 찾아가 「천하가 모두 선양을 바라는데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떠보았습니다. 제갈탄이 「그대는 가 예주의 아들이 아닌가. 대대로 위의 은혜를 입고서 사직을 남에게 넘기려 하는가」 하고 꾸짖자 가충은 말이 없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제갈탄이 위명이 높아 반드시 배반할 것이니 「지금 부르면 빨리 배반해도 일이 작고, 부르지 않으면 늦게 배반해도 화가 크다」고 아뢰었고, 감로 2년(257) 사공으로 불린 제갈탄은 과연 일어났습니다. 수춘을 칠 때에는 도랑을 깊이 하고 보루를 높여 죄면 싸우지 않고 이긴다고 하여 사마소가 따랐고, 성이 떨어지자 사마소는 보루에 올라 그를 위로했습니다. 선양향후로 나아가고 정위가 되어서는 법리에 밝아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았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중호군으로 옮긴 뒤 감로 5년(260) 고귀향공 조모가 사마소의 부를 치러 나서자, 가충은 무리를 이끌고 남궐에서 맞서 싸웠습니다. 군이 무너지려 할 때 태자사인 성제가 「오늘의 일을 어찌하오」 하고 묻자 그는 「공께서 너희를 길러 둔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했고, 성제는 창을 뽑아 들고 천자의 수레로 덤벼들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한진춘추』는 성제가 찌른 칼날이 황제의 등 뒤로 나왔다고 적고, 『위말전』은 죽일지 잡을지 묻는 성제 형제에게 가충이 「죽여라」 했다고 적습니다. 『진서』 문제기에 따르면 복야 진태는 「오직 가충을 허리 베어야 조금이나마 천하에 사죄할 수 있다」고 했으나, 사마소는 성제에게 죄를 돌려 베었습니다. 『진제공찬』은 이 난에서 사마소가 가충 덕에 화를 면했다고 적습니다. 조환이 서자 그는 안양향후로 나아가 성 밖의 여러 군을 거느렸습니다. 『진서』는 그의 어머니 유씨가 아들과 성제의 일을 끝내 모른 채 성제가 불충했다며 자주 꾸짖으니 곁의 사람들이 몰래 웃었다고 적습니다.

함희 원년(264) 종회가 촉에서 반란을 꾀하자 사마소는 그에게 관중 · 농우의 군을 도독하게 했으나 그가 이르기 전에 종회가 죽었습니다. 사마소는 나라의 기밀을 다 그와 의논했고 배수 · 왕침 · 양호 · 순욱과 함께 심복의 일을 맡겼으며 법률을 정하게 했습니다. 『진서』는 그가 문서의 재주가 있고 윗사람의 뜻을 잘 살폈다고 적습니다. 사마소가 형의 뒤를 이은 사마유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그는 사마염이 너그럽고 어질며 맏이라 임금의 덕이 있다고 했고, 병든 사마소는 뒷일을 묻는 사마염에게 「너를 아는 이는 가공려다」 했습니다. 함희 2년(265) 사마염이 선양을 받자 그는 큰 명을 세운 공으로 거기장군 · 상서복야가 되고 노군공에 봉해졌습니다. 그가 정한 새 율령은 태시 4년(268) 반포되어 백성이 편하게 여겼습니다.

『진서』는 그가 선비를 즐겨 천거하고 끝까지 돌보았으나 몸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이끌지 못하고 오로지 아첨으로 비위를 맞추었다고 적습니다. 곧은 시중 임개 · 중서령 유순이 그를 미워했고, 태시 7년(271) 저와 강이 일어나자 임개의 건의로 그는 진 · 양 두 주의 도독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송별 자리에서 중서감 순욱은 태자와 혼인을 맺는 길밖에 없다며 스스로 말을 꺼내 주었고, 마침 서울에 눈이 두 자나 내려 군이 떠나지 못한 사이 혼인이 정해져 그는 서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진서』 후비전에 따르면 무제는 처음 「가씨 집안은 질투가 많고 아들이 적으며 딸이 못나고 작고 검다」며 위관의 딸을 원했으나, 양황후가 굳이 청해 태시 8년(272) 열다섯 살 가남풍이 태자비가 되었습니다. 전처 이씨가 낳은 딸 가포는 제왕 사마유의 비였는데, 무제가 병들었을 때 하남윤 하후화가 「두 사위는 다 같은 친척이니 덕 있는 이를 세워야 한다」고 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이를 들은 무제는 그의 병권을 거두었습니다. 그래도 대우는 줄지 않아 태위 · 녹상서사에 올랐습니다.

『진서』는 아내 곽괴가 투기가 심해, 세 살 아들 가려민을 안은 유모를 가충이 다가가 쓰다듬자 남편이 유모와 사통한다며 매질해 죽였고 아이는 유모를 그리다 병들어 죽었다고 적습니다. 뒤에 낳은 아들도 같은 일로 죽어 그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풍의 딸인 전처 이씨가 사면되어 돌아오자 무제가 두 부인을 두게 해 주었으나, 그는 곽괴가 두려워 사양했습니다.

함녕 5년(279) 오를 칠 때 그를 대도독으로 삼아 여러 군을 거느리게 하자, 그는 해마다 곡식이 여물지 않아 때가 아니며 늙어 감당할 수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무제가 「그대가 가지 않으면 내가 몸소 나서겠다」 하자 마지못해 절월을 받고 양양에 머물렀습니다. 이듬해 왕준이 무창을 이기자 그는 여름이면 역병이 돌 것이니 군을 불러들이자며 「장화를 허리 베어도 천하에 사죄하기 모자란다」는 표를 올렸습니다. 두예가 평정이 아침저녁에 달렸다며 급히 맞서는 표를 올렸으나, 그 사자가 환원에 이르렀을 때 손호는 이미 항복했습니다. 그는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 죄를 청하려 했으나 무제는 그를 맞아들이고 식읍 8천 호를 더했습니다.

태강 3년(282) 4월 죽으니 나이 예순여섯이었습니다. 무제는 크게 슬퍼하며 태재를 추증했고, 박사가 「황」 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받지 않고 「무」 로 정했습니다. 곽괴는 외손 한밀을 그의 뒤로 세웠습니다. 『진서』의 사관은 그를 「위 조정의 패역일 뿐 아니라 진 황실의 죄인」이라 하고, 「위가 깎여 나갈 때는 공려가 힘을 다했고 진이 무너질 때는 남풍도 힘을 다했다」고 평했습니다.

非惟魏朝之悖逆,抑亦晉室之罪人者歟
위 조정의 패역일 뿐 아니라 진 황실의 죄인이기도 하지 않은가『진서』 가충전 끝의 사관의 평
昔當塗闕翦,公閭實肆其勞,典午分崩,南風亦盡其力
위가 깎여 나갈 때는 공려(가충)가 실로 힘을 다했고, 진이 무너질 때는 남풍(가남풍)도 힘을 다했다『진서』 가충전 끝의 사관의 평

삼국지연의

『삼국연의』 제111회 · 제114~115회 · 제118~120회

연의에서 가충은 제111회에 처음 나옵니다. 옛 건위장군 가규의 아들로 사마소 대장군부의 장사이자 심복이라 소개되며, 사방의 인심을 먼저 살피라고 권한 뒤 군사를 위로한다는 이름으로 회남의 제갈탄을 찾아갑니다. 술자리에서 「낙양의 어진 이들이 다 주상이 나약하다 하니 사마 대장군이 위의 대통을 이을 만하다」며 떠보다가 「너는 가 예주의 아들로 대대로 위의 녹을 먹었으면서」라는 호통을 듣고, 남의 말을 전했을 뿐이라며 물러납니다. 돌아와 제갈탄을 서둘러 없애라고 하고, 제갈탄이 일어나자 천자와 태후를 모시고 함께 나서야 뒤탈이 없다고 권합니다.

제114회에서는 촉을 치겠다는 사마소에게 천자가 의심하니 안 된다며 조모가 지은 「잠룡시」를 일러 줍니다. 조모가 군사를 이끌고 나오자 갑옷 차림으로 성쉬 · 성제 형제를 좌우에 두고 철갑 금병 수천을 거느려 막고, 군사들이 천자를 보고 움직이지 못하자 「사마공이 너희를 무엇에 쓰려고 길렀겠느냐, 바로 오늘의 일 때문이다」 합니다. 죽일지 묶을지 묻는 성제에게 「사마공의 명은 죽은 것만 바란다」고 답해 성제가 조모를 찔러 죽입니다. 진태가 가충만은 베어야 한다고 했으나 사마소는 성제에게 죄를 돌리고, 성제는 「내 죄가 아니라 가충이 네 명을 전한 것」이라 외치다 혀가 잘립니다. 가충 등은 사마소에게 선양을 받으라 권하다 그의 뜻이 아들 사마염에게 있음을 알고 그만둡니다.

제115회에서는 강유를 자객으로 없애자고 했다가 순욱에게 반박당하고, 제118회에서는 교만한 등애를 누르려면 종회에게 벼슬을 주라 하고 3만 군을 이끌고 사곡으로 들어갑니다. 제119회에서는 난리가 난 성도에 먼저 이르러 방을 붙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낙양의 잔치에서 「사람이 이렇게 무정할 수 있는가」 하는 사마소의 말을 곁에서 듣습니다. 사마염을 세자로 세우라고 간하고, 사마소가 죽은 뒤에는 배수와 함께 사마염에게 조비의 옛일을 따르라 권하며, 조환의 명으로 수선대를 쌓고 칼을 쥐고 곁에 서서 조환에게 엎드려 명을 들으라고 이릅니다.

제120회에서는 손호를 칠 때를 기다리자 하고, 양호의 오 정벌 상주에는 순욱 · 풍순과 함께 안 된다고 힘써 말합니다. 진군이 우저를 떨어뜨리자 군이 오래 밖에 있어 병이 날 것이니 불러들이자 하고, 이를 반대하는 장화에게 「너를 베어도 천하에 사죄하기 모자란다」고 꾸짖습니다. 오가 항복한 뒤 낙양에 온 손호에게 「남쪽에서 사람의 눈을 파고 얼굴 가죽을 벗겼다는데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묻자, 손호가 「임금을 죽인 신하와 간사하고 불충한 자에게 이 형벌을 내렸다」고 답하니 가충은 말없이 크게 부끄러워합니다. 연의에서 가충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정사와 연의가 다른 곳

생애

  1. 255낙가에서 관구검 · 문흠을 치는 사마사를 따랐고 허창에서 남은 군을 감독했습니다.
  2. 257제갈탄을 찾아가 선양을 떠본 뒤 그가 반드시 배반하리라 아뢰었습니다.
  3. 258수춘을 에워 지치게 하자는 꾀가 맞아 성이 떨어진 뒤 선양향후가 되었습니다.
  4. 260남궐에서 조모의 군을 막다가 성제에게 「오늘을 위해 길렀다」며 찌르게 했습니다.황제를 찌른 손
  5. 260진태가 그를 허리 베라 했으나 사마소는 성제에게 죄를 돌리고 그를 안양향후로 올렸습니다.칼을 든 황제
  6. 264종회의 반란에 관중 · 농우를 도독했고 5등작이 서자 임기후가 되었습니다.
  7. 265사마염을 세자로 밀었고 진이 서자 거기장군 · 노군공이 되었습니다.
  8. 268그가 정한 새 율령이 천하에 반포되었습니다.
  9. 271진 · 양 두 주의 도독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딸의 혼인 덕에 서울에 남았습니다.
  10. 272딸 가남풍이 태자비가 되었고, 그해 7월 사공에 올랐습니다.
  11. 276무제의 병중에 사마유를 세우자는 말에 답하지 않아 병권을 잃었으나 태위가 되었습니다.
  12. 279오 정벌에 반대하면서도 대도독이 되어 여러 군을 거느리고 양양에 머물렀습니다.진을 연 두 사람
  13. 280장화를 베자는 표를 올렸으나 오가 먼저 항복했고, 식읍 8천 호를 더 받았습니다.
  14. 2824월 예순여섯으로 죽어 태재로 추증되고 시호를 무라 했습니다.

연대표 속 이 사람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가족

아버지 가규 · 어머니 유씨 · 아우 가혼 · 전처 이씨 · 후처 곽괴 · 딸 가포 · 가유 · 가남풍 · 가오 · 일찍 죽은 아들 가려민

인연

해후 마주치면 서로 방벽이 오른다

남긴 말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싸움터에 들며

뒤는 내가 맡소.

말을 열며

더러운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법이오.

되받으며

충신 놀음은 순진한 자의 것이오.

말문이 막혀

…역사가 나를 뭐라 적을까.

말문이 막혀

이긴 자가 사관을 고르지.

설전을 이기고

결과가 명분을 만드는 법이오.

설전에 지고

시비는 후세에 미루겠소.

이긴 뒤

셈은 이미 끝나 있었소.

진 뒤

…이 일도 내가 지고 가겠소.

쓰러지며

그 일은 내가 지고 간다.

같은 기치 아래

사마의양호곽회사마사사마소왕준손례진태위관왕기왕창두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