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문규(文珪) · 미상 ~ 234년 · 연주 동군 발간현 · 손견 휘하
관우를 생포하는 대공을 세웠으나 재물을 탐하는 악벽이 있었던 맹장
출전 · 『삼국지』 오서 반장전 · 오주전 · 주연전 · 오범전 · 육손전 · 여대전 · 제갈근전과 배송지 주의 『오록』
반장은 자가 문규이며 동군 발간현 사람입니다. 건안 원년(196) 손권이 양선장이 되었을 때 처음 가서 그를 따랐습니다. 성품이 거리낌이 없고 술을 즐겼으며, 가난해 늘 외상으로 술을 사 마셨고 빚쟁이가 문에 이르면 「뒷날 부자가 되면 갚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손권은 그를 남다르게 여겨 아꼈고, 군사를 모으게 하니 백여 명을 얻어 마침내 장수로 삼았습니다. 산적을 친 공으로 별부사마가 되었고, 뒤에 오의 큰 시장에서 간사한 자를 살피는 일을 맡자 도적이 끊겨 이 일로 이름이 났습니다.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옮기니, 유표가 형주에 있어 백성이 자주 노략질을 당하던 고을에 반장이 일을 맡고부터는 도적이 경계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웃 건창현에서 난이 일자 건창을 맡고 무맹교위가 되어 나쁜 무리를 다스려 한 달 만에 모두 평정했고, 흩어진 이들을 모아 8백 명을 얻어 건업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주전은 건안 20년(215) 반장이 손교 · 노숙의 군과 함께 익양에서 관우를 막았다고 적습니다. 그해 합비 싸움에서 장료가 갑자기 들이치자 장수들이 미처 대비하지 못해 진무가 싸우다 죽고 송겸 · 서성의 군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뒤쪽에 있던 반장은 곧 말을 달려 나아가 말을 가로질러 세우고, 달아나는 송겸 · 서성의 군사 둘을 베니 군사들이 모두 돌아와 싸웠습니다. 손권이 크게 장하게 여겨 편장군으로 삼았고, 반장은 백교를 거느리고 반주에 주둔했습니다.
건안 24년(219) 손권이 관우를 칠 때 반장은 주연과 함께 관우가 달아날 길을 끊으러 임저에 이르러 협석에 머물렀고, 반장의 부하 사마 마충이 관우와 그 아들 관평, 도독 조루 등을 사로잡았습니다. 오주전은 관우가 맥성에서 거짓으로 항복하고 달아나자 손권이 먼저 주연과 반장을 보내 그 길을 끊게 했고, 12월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 부자를 사로잡았다고 적습니다. 오범전도 손권이 관우의 항복이 거짓이라는 오범의 말을 듣고 반장을 보내 관우가 달아날 길을 막게 했다고 적습니다. 손권은 곧 의도군의 무현과 자귀현을 떼어 고릉군을 만들고 반장을 그 태수와 진위장군으로 삼아 율양후에 봉했습니다. 감녕이 죽자 반장은 그 군사도 아울러 거느렸습니다.
황무 원년(222) 유비가 이릉으로 나오자 반장은 육손과 힘을 합쳐 막았고, 그의 부하가 유비의 호군 풍습 등을 베어 죽이고 다치게 한 자가 매우 많아 평북장군 · 양양태수가 되었습니다. 육손전은 유비가 백제에 머문 뒤 서성 · 반장 · 송겸 등이 다투어 표를 올려 다시 치게 해 달라고 청했다고 적습니다. 이어 위의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에워싸고 앞 부대 3만 명으로 부교를 놓아 백리주로 건너왔습니다. 제갈근 · 양찬이 군을 모아 구하러 왔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고 위군은 날마다 끊임없이 건너왔습니다. 반장은 「위의 기세가 막 오르고 강물도 얕으니 아직 싸울 수 없다」 하고 거느린 군을 이끌고 위군의 상류 50리로 가서 갈대 수백만 묶음을 베어 큰 뗏목을 엮었습니다. 물을 따라 불을 놓아 부교를 태우려는 것이었는데, 뗏목을 다 만들고 물이 불기를 기다려 내려보내려던 참에 하후상이 곧 군을 물렸습니다. 『오록』(제갈근전 주)에 따르면 봄물이 불자 반장 등이 상류에 물 위의 성을 쌓고 제갈근이 부교를 치니 위군이 물러갔습니다. 반장은 그 뒤 내려와 육구를 지켰습니다. 주연전은 황무 6년(227) 손권이 석양을 치고 돌아올 때 반장이 뒤를 맡았으나, 밤에 나서다 어지러워진 틈에 적이 쫓아오자 막지 못했고 주연이 되돌아 적을 막았다고 적습니다. 황룡 원년(229)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반장은 우장군이 되었습니다.
반장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웠으나 금령이 엄숙했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습니다. 거느린 군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는데도 그가 있는 곳은 늘 만 명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싸우다 머물면 곧 군의 시장을 세웠는데, 다른 군에 없는 것도 모두 거기서 얻어 넉넉히 썼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사치스러워 말년에는 더욱 심해졌고 입고 쓰는 것이 분수를 넘었으며, 아전과 군사 가운데 부유한 이를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기도 하는 등 여러 번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감찰하는 관리가 들추어 아뢰었으나 손권은 그의 공을 아껴 번번이 용서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반장은 가화 3년(234)에 죽었습니다. 아들 반평은 행실이 없어 회계로 옮겨졌고, 건업에 사는 아내에게는 밭과 집을 내리고 객 50가의 부역을 덜어 주었습니다. 여대전은 그해 손권이 여대에게 반장의 군사를 거느리고 육구에 주둔하게 했다고 적습니다. 진수는 「반장이 몸을 닦지 못했는데도 손권이 허물을 잊고 공을 기억할 수 있었으니, 동남을 지켜 낸 것이 마땅하다」고 평했습니다.
以潘璋之不脩,權能忘過記功,其保據東南,宜哉所領兵馬不過數千,而其所在常如萬人『삼국연의』 제38~83회
연의에서 반장은 제38회에 손권이 얻은 좋은 장수의 하나로 「동군의 반장」이라 소개되고, 같은 회의 황조 싸움에서 달아나던 소비를 몇 합 만에 사로잡습니다. 적벽 싸움에서는 제44회 주유의 셋째 부대에 들고, 제49~50회에는 흰 기를 든 군사 3천을 이끌고 한양으로 가서 동습과 함께 불을 놓고 고함을 지릅니다. 제51회 남군 싸움에 나서고, 제55회에서는 손권의 명으로 진무와 함께 형주로 돌아가는 유비를 쫓다가 손부인의 꾸짖음에 물러섭니다. 제61회 유수에서는 한당 · 주태 · 진무와 함께 산 뒤에서 나와 활을 쏘아 조조를 물리치고, 제67회 환성 싸움에서는 뒤를 맡습니다.
제75회 여몽의 형주 습격에 일곱 장수의 하나로 뒤따르고, 제77회에서는 여몽의 계책에 따라 날랜 군사 5백으로 임저의 산길에 숨습니다. 맥성을 빠져나온 관우 앞에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가 세 합 만에 달아나지만, 결석에서 숨어 있던 군사들이 갈고리와 올가미로 관우의 말을 넘어뜨려 반장의 부장 마충이 관우를 사로잡고, 반장은 주연과 함께 관평을 에워싸 사로잡습니다.
제82회 이릉 싸움에서 장소의 아룀으로 선봉이 되고, 제83회에서는 관우가 쓰던 청룡도를 휘두르며 황충과 싸우다 달아나고, 이튿날 다시 황충을 꾀어 한당 · 주태 · 능통과 함께 에워싸 마충의 화살에 맞게 합니다. 유비가 효정을 얻은 날 관흥에게 쫓겨 산골짜기로 달아났다가, 밤에 관우의 신상을 모신 노인의 집에 묵으러 들어갑니다. 먼저 와 있던 관흥이 꾸짖자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문밖에서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고, 놀라 넋이 흩어진 사이 관흥의 칼에 베입니다. 관흥은 그의 심장을 꺼내 관우의 신상 앞에 제사하고 청룡언월도를 되찾습니다. 연의에서 반장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뒤에 보즐이 그가 죽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내(건업에 살며 밭과 집을 받음) · 아들 반평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오의 반문규요.
관우도 내 그물에 걸렸소. 그대쯤이야.
이기면 전리품은 내 것이오.
…이문이 안 남는 싸움이군.
본전은 뽑아야겠소.
청룡도도 한때 내 것이었소.
이번 판은 손해가 크구려.
이 손이 또 공을 세웠소.
…이 손도 늙었구려.
관공을 잡은 손이 이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