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백공(伯恭) · 미상 ~ 264년 · 익주 건위군 무양현 · 유비 휘하
강유의 북벌을 말리면서도 끝까지 함께 나아간 촉의 노장
출전 · 『삼국지』 촉서 장익전과 배송지 주의 『익부기구전』 · 『속한서』 · 『화양국지』 · 강유전 · 요화전 · 마충전 · 왕평전 주의 『화양국지』 · 조운전 주의 『조운별전』 · 위서 종회전 · 『화양국지』 남중지 · 유후주지
장익은 자가 백공이며 건위군 무양 사람입니다. 고조부 장호는 사공을, 증조부 장강은 광릉태수를 지내 모두 이름과 자취를 남겼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속한서』는 장강이 여러 사람과 함께 천하의 탐관을 살피라는 명을 받았을 때 홀로 낙양의 도정에 수레바퀴를 묻고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있는데 어찌 여우와 살쾡이를 묻겠는가」 하며 대장군 양기를 탄핵했다고 적습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익주목을 겸하자 장익은 서좌가 되었고, 건안 말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강양현장이 되었다가 부릉현령으로 옮기고, 재동태수를 거쳐 광한 · 촉군태수에 이르렀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은 219년 한수의 싸움 때 면양현장 장익이 조운의 진영에 있다가 문을 닫고 지키려 했다고 적는데, 장익전에는 면양현장을 지냈다는 말이 없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건흥 9년(231) 장익은 내강도독 · 수남중랑장이 되어 남중을 맡았습니다. 성품이 법을 엄하게 지켜 풍속이 다른 이민족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이민족 우두머리 유주가 등을 돌려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쳤습니다. 유주를 깨뜨리기 전에 소환되어 돌아가게 되자 아랫사람들은 모두 곧장 말을 달려 돌아가 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장익은 「그렇지 않다. 나는 오랑캐가 소란을 일으켜 직분을 다하지 못한 까닭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대신할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 싸움터에 있으니 양식을 나르고 곡식을 쌓아 적을 멸할 밑천을 마련해야 한다. 어찌 물러난다고 나라의 일을 버리겠는가」 하고, 일을 게을리하지 않다가 대신할 사람이 온 뒤에야 떠났습니다. 뒤를 이은 마충은 그가 닦아 놓은 터전으로 유주를 무찔렀고, 승상 제갈량은 이를 듣고 훌륭하게 여겼습니다. 마충전은 유주의 반란과 장익의 소환을 건흥 11년(233)의 일로 적습니다.
건흥 12년(234) 제갈량이 무공으로 나설 때 장익은 전군도독이 되어 부풍태수를 겸했습니다. 제갈량이 죽은 뒤 전령군이 되었고, 유주를 친 공을 뒤늦게 따져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연희 원년(238) 들어가 상서가 되었고, 차츰 옮겨 건위 요새의 도독이 되고 부절을 받았으며, 도정후에 봉해지고 정서대장군이 되었습니다.
연희 18년(255) 장익은 위장군 강유와 함께 성도로 돌아왔습니다. 강유가 다시 군사를 내자고 의논하자 오직 장익만이 조정에서 다투어, 나라가 작고 백성이 지쳤으니 무력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강유는 듣지 않고 장익 등을 데리고 나섰고, 장익의 자리를 진남대장군으로 올렸습니다. 강유가 적도에 이르러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크게 깨뜨려 조수에 빠져 죽은 왕경의 무리가 만을 헤아리자, 장익은 「그칠 만하오. 더 나아가서는 안 되니, 나아가면 이 큰 공을 허물 수도 있소」 했습니다. 강유가 크게 노한 대목 뒤에 「뱀을 그리고 발을 붙인다」는 말이 이어지는데, 장익전의 글로는 누구의 말인지 뚜렷하지 않고 『화양국지』는 장익의 말로 적습니다. 강유는 끝내 적도에서 왕경을 에워쌌으나 성을 떨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장익이 다른 의논을 낸 뒤로 강유는 속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늘 이끌고 함께 나갔고, 장익도 마지못해 따라갔습니다.
경요 2년(259) 좌거기장군이 되어 기주자사를 겸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화양국지』는 뒤에 장익과 요화가 나란히 큰 장수가 되자 그때 사람들이 「앞에는 왕평과 구부, 뒤에는 장익과 요화」라 했다고 적고, 요화전은 요화의 벼슬이 장익과 나란했다고 적습니다. 경요 6년(263) 종회가 관중에서 군사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강유는 장익과 요화를 보내 양안관 어귀와 음평 다리목을 나누어 지키게 하자고 아뢰었으나, 황호가 무당의 말을 믿고 적이 오지 않는다며 그 일을 덮었습니다. 종회와 등애가 움직인 뒤에야 조정은 좌거기장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 등을 양안관 어귀로 보냈으나 그들이 한수현에 이르렀을 때 관 어귀는 이미 떨어졌고, 장익과 동궐은 음평에서 물러나던 강유 · 요화와 합쳐 검각으로 물러나 종회를 막았습니다. 촉이 망하자 장익은 강유와 함께 검각에 있다가 부현의 종회에게 가서 항복했고, 이듬해(264) 정월 종회를 따라 성도에 들어갔다가 종회의 난리 속에 난병에게 죽었습니다. 『화양국지』는 호열 등이 종회 · 강유와 함께 장익을 죽였다고 적습니다.
아들 장미는 뜻이 도타워 배우기를 좋아했고 광한태수에 이르렀다고 『화양국지』는 적습니다. 진수는 「등지는 굳고 곧으며 소탈하고 밝아 벼슬에 있으면서 집안을 잊었고, 장익은 강유의 날카로움에 맞섰으며, 종예는 손권의 엄함을 막아 냈으니 모두 일컬을 만하다」고 평했습니다.
張翼亢姜維之銳,宗預禦孫權之嚴,咸有可稱吾方臨戰場,當運糧積穀,為滅賊之資,豈可以黜退之故而廢公家之務乎『삼국연의』 제64~65회 · 제71회 · 제81회 · 제87~104회 · 제109~119회
연의에서 장익은 제64회에 유장이 탁응과 함께 낙성으로 보낸 장수로 처음 나옵니다. 낙성이 에워싸이자 성 위에서 유괴를 베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는데, 연의는 그를 무양 사람이라 밝힙니다. 이어 제갈량의 명으로 오의와 함께 조운을 이끌고 가서 강양 · 건위의 고을들을 다독이고, 제65회에서 유비가 벼슬을 준 유장의 옛 신하들 가운데 이름이 오릅니다. 제71회 한수의 싸움에서는 조운의 부장으로 진채를 지키다가, 조조의 군이 뒤쫓아 오자 문을 닫고 지키자고 했으나 조운이 오히려 문을 활짝 열게 합니다. 제81회 유비의 동정에서는 부동과 함께 중군호위가 됩니다.
제87~90회 남정에서는 부장으로 왕평 · 장억 등과 함께 여러 번 복병이 되어 만왕의 장수 아회남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우고, 제91회 북벌 때 전군도독 · 영부풍태수가 됩니다. 제95회 가정에서 진 뒤에는 먼저 가서 검각의 길을 고쳐 돌아갈 길을 마련하고, 제99회에서는 장합이 뒤쫓자 일을 그르치면 목을 바치겠다며 스스로 나서 왕평과 함께 복병이 되어 사마의까지 막아 냅니다. 제102~103회에서는 요화와 함께 길을 끊어 사마의를 크게 깨뜨리고, 제104회에서 죽음을 앞둔 제갈량은 그를 충의로운 선비로 꼽습니다.
제109회에서 장익은 요화와 함께 강유의 좌우 선봉이 됩니다. 제110회에서 정서대장군 장익은 촉 땅이 좁고 재물이 적으니 멀리 치지 말고 험한 곳을 지키며 군사와 백성을 아껴야 한다고 말렸으나, 강유가 듣지 않자 곧 서둘러 나아가면 위가 막지 못해 반드시 이긴다며 계책을 보탭니다. 조수 서쪽에서 왕경을 크게 깨뜨린 뒤에는 공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칠 만하고 더 나아가다 뜻대로 안 되면 뱀을 그리고 발을 붙이는 격이라며 거듭 말렸으나, 강유는 적도성을 치다 진태와 등애에게 막혀 물러납니다. 제114회에서는 백성이 해마다의 싸움을 원망한다며 이긴 김에 군을 거두자고 하고, 제115회에서는 기산의 진채를 치다 등애에게 에워싸였다가 강유에게 구원받습니다. 제116회에서 좌거기장군 장익은 황호가 무당의 말을 믿고 군사를 내주지 않자 스스로 군을 일으켜 강유를 맞이하고, 제117~118회에서 검각을 지키다 강유와 함께 종회에게 항복합니다. 제119회에서 종회와 강유가 죽는 난리 속에 장익 등도 어지러운 군사들 가운데 죽으니, 연의에서 장익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장미 · 고조부 장호 · 증조부 장강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좌거기장군 장익이오.
말리는 것도 따라나서는 것도 내 몫이오.
반대하였다 하여 뒤에 서지는 않소.
…나라가 작고 백성이 지쳤다 하였소.
그래도 앞장선 것은 나였소.
말리고도 나아가는 것이 신하의 일이오.
말은 졌으나 발은 앞에 있었소.
뜻이 갈려도 발은 같이 가오.
말린 대로 되었으나 기쁘지 않소.
끝까지 앞에 서 있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