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문원(文遠) · 169년 무렵 ~ 222년 · 병주 안문군 마읍현 · 여포 휘하
합비에서 800명으로 10만 대군을 박살 내어 손권의 악몽이 된 위나라의 무신
출전 · 『삼국지』 위서 장료전과 배송지 주의 『부자』 · 손성의 말 · 『위서』 · 위서 무제기 · 삼소제기 · 악진전 · 이전전 · 장패전 · 촉서 관우전과 배송지 주의 『부자』 · 오서 오주전과 배송지 주의 『헌제춘추』 · 감녕전과 배송지 주의 『강표전』 · 능통전 · 반장전
장료는 자가 문원이며 안문군 마읍현 사람입니다. 본래 섭일의 후손인데 원한을 피해 성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젊어서 군의 관리가 되었고, 한나라 말 병주자사 정원이 그의 무력이 남보다 뛰어나다 하여 종사로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가게 했습니다. 대장군 하진이 그를 하북으로 보내 군사를 모으게 하자 천여 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하진은 이미 패해 있었고, 장료는 그 군사를 이끌고 동탁에게 속했습니다. 동탁이 패하자 여포에게 속해 기도위가 되었고, 여포가 이각에게 진 뒤 동쪽 서주로 달아날 때 따라가 노국의 상을 맡았으니 그때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건안 3년(198) 조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깨뜨리자 장료는 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중랑장이 되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무제기는 건안 5년(200) 백마에서 원소의 장수 안량을 칠 때 조조가 장료와 관우를 앞세워 쳐부수고 안량을 베었다고 적는데, 관우전에 따르면 안량을 찔러 목을 벤 이는 관우입니다. 조조가 관우의 속을 떠보게 한 이도 장료였습니다. 관우전 배송지 주에 인용된 『부자』는 장료가 관우의 떠날 뜻을 알리면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렵고 알리지 않으면 임금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 망설이다가, 「공은 임금이요 아버지이고 관우는 형제일 뿐」이라 탄식하고 아뢰었다고 적습니다.
원소가 무너진 뒤 장료는 하후연과 함께 동해에서 창희를 에워쌌습니다. 몇 달이 지나 군량이 떨어지자 물러나자는 의논이 일었는데, 장료는 창희가 자기를 자주 눈여겨보고 화살도 드물게 쏘는 것을 보고 그가 망설이고 있다며 말을 걸었습니다. 「조공은 신령한 무용으로 덕을 베풀어 사방을 품으시니 먼저 붙는 이가 큰 상을 받는다」는 말에 창희가 항복을 허락하자, 장료는 홀몸으로 삼공산에 올라 그의 집에 들어가 아내와 자식에게 절했고 창희는 기뻐하며 장료를 따라 조조에게 갔습니다. 조조는 창희를 돌려보낸 뒤 「이것은 대장의 법도가 아니다」 하고 장료를 꾸짖었습니다. 이어 장료는 업이 무너지자 조국과 상산을 돌며 흑산의 손경 등을 항복시켰고, 바닷가로 나가 요동의 도적 유의 등을 깨뜨렸습니다. 업으로 돌아오자 조조가 몸소 나와 맞으며 수레에 함께 태웠고 탕구장군으로 삼았습니다. 건안 12년(207) 유성을 칠 때 백랑산에서 갑자기 오환의 무리와 마주치자 장료는 싸우자고 권하며 기세를 떨쳤고, 조조는 이를 장하게 여겨 쥐고 있던 깃발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장료는 적을 크게 깨뜨리고 선우 답돈을 베었습니다.
장사현으로 떠날 무렵에는 밤중에 군중이 놀라 불이 나고 온 군이 어지러웠습니다. 장료는 「한 진영이 다 배반할 리 없으니 변을 꾸민 자가 사람들을 흔들려는 것」이라며 배반하지 않은 이는 제자리에 앉게 하고 친병 수십 명과 진 한가운데 서 있다가, 곧 주모자를 잡아 베었습니다. 진란과 매성이 여섯 현을 들어 배반하자 장료는 장합 등을 거느리고 진란을 쳤습니다. 진란이 높이 스무 리가 넘는 천주산 위에 진을 치자 여러 장수가 군사는 적고 길은 험하다며 말렸지만, 장료는 「이것이 이른바 하나 대 하나이니 용감한 자가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며 산 아래까지 나아가 쳐서 진란과 매성의 목을 베었습니다.
조조는 손권을 치고 돌아가며 장료에게 악진 · 이전 등과 함께 칠천여 명으로 합비를 지키게 하고, 건안 20년(215) 장로를 치러 떠나며 호군 설제에게 「적이 오면 열라」고 적은 교령을 맡겼습니다. 손권이 10만 무리로 합비를 에워싸자 열어 본 교령에는 「손권이 오거든 장 장군과 이 장군은 나가 싸우고, 악 장군은 호군을 지키며 싸우지 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장료는 구원을 기다리면 반드시 지니 적이 다 모이기 전에 맞받아쳐 기세를 꺾어야 한다고 했고, 이전도 뜻을 같이했습니다. 장료는 밤에 따르겠다는 군사를 모아 800명을 얻고 소를 잡아 먹였습니다. 새벽에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채 앞장서 적진을 무너뜨려 수십 명을 죽이고 두 장수를 베었으며, 제 이름을 크게 외치며 보루를 뚫고 손권의 대장기 아래까지 이르렀습니다. 놀란 손권은 높은 무덤에 올라 긴 창으로 몸을 지켰고, 장료의 무리가 적은 것을 보고 여러 겹으로 에워쌌습니다. 장료는 포위를 뚫고 수십 명과 빠져나왔다가 남은 군사들이 「장군은 우리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치자 다시 들어가 그들을 구해 냈습니다. 아침부터 한낮까지 싸우자 오나라 군사는 기가 꺾였고, 손권은 열흘 남짓 에워쌌으나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오주전은 물러나던 손권이 나루 북쪽에서 장료의 습격을 받아 능통 등이 목숨을 걸고 막는 사이 말을 달려 다리를 넘어 벗어났다고 적습니다. 조조는 장료를 정동장군으로 삼았고 이듬해 합비에 와서 장료가 싸운 곳을 돌아보며 오래 탄식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손성은 조조가 성품이 다른 장수들을 섞어 두고 미리 교령을 남겨 일이 닥치자 부절을 맞춘 듯 들어맞았다고 평했습니다.
조비가 위왕이 되자 장료는 전장군이 되었고 형 장범과 아들 하나가 열후에 봉해졌습니다. 조비는 장료의 어머니에게 수레를 내려 진중으로 보내 주었고, 황제가 된 뒤 그를 진양후에 봉했습니다. 황초 2년(221) 낙양궁에 들어온 장료에게 조비는 오나라를 깨뜨린 일을 몸소 묻고 「이 또한 옛날의 소호로다」라고 감탄했으며, 장료를 따라 오나라를 깨뜨린 보졸들을 모두 호분으로 삼았습니다. 옹구에 머물다 병이 나자 조비는 태의를 보내고 가까이 불러 손을 잡으며 어의를 내렸습니다. 황초 3년(222) 병든 몸으로 조휴와 함께 배를 타고 해릉에 이르자 손권은 여러 장수에게 「장료가 비록 병들었으나 당해 낼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일렀습니다. 그해 여러 장수와 함께 손권의 장수 여범을 깨뜨렸으나 병이 깊어져 강도에서 죽었고, 조비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호는 강후입니다.
아들 장호가 뒤를 이어 편장군에 이르렀고 손자 장통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황초 6년(225) 조비는 「합비 싸움에서 장료와 이전은 보졸 800으로 적 10만을 깨뜨렸으니 예부터 없던 일」이라며 두 사람의 아들 하나씩에게 관내후를 내렸고, 정시 4년(243) 장료는 악진 · 장합 · 서황 등과 함께 조조의 사당 뜰에 모셔졌습니다. 진수는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을 한 권에 묶고 평에서 「태조가 무공을 세울 때 그때의 좋은 장수로는 다섯 사람이 으뜸이었다」고 하며 장료와 서황의 기록이 자세히 갖추어졌다고 했습니다. 이 다섯을 부르는 「오자양장」이라는 이름은 『삼국지』에도 연의에도 없고, 이 평의 「좋은 장수」와 「다섯 사람」에서 따온 뒷날의 이름입니다.
太祖建茲武功,而時之良將,五子爲先合肥之役,遼典以步卒八百,破賊十萬,自古用兵,未之有也『삼국연의』 제11~86회
연의에서 장료는 제11회 복양에서 처음 나옵니다. 여포 곁에 늘어선 여덟 건장 가운데 첫째로 「안문 마읍 사람 장료, 자는 문원」이라 소개되고, 제12회에서는 복양 성안의 골목에서 뛰쳐나와 조조를 들이칩니다. 제18회 소패에서 성 위의 관우가 「그대의 풍모가 범상치 않은데 어찌 도적에게 몸을 맡겼소」 하자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고, 관우는 그에게 충의의 기운이 있음을 알아봅니다. 제19회 하비가 물에 잠겨 무너질 때 서문에서 사로잡힌 장료는 백문루에서 목숨을 비는 여포를 「죽으면 죽을 뿐 무엇이 두려우냐」고 꾸짖고, 조조에게는 복양에서 불이 크지 않아 나라의 도적을 태워 죽이지 못한 것이 아깝다고 합니다. 조조가 칼을 들자 제20회에서 유비가 팔을 붙잡고 관우가 무릎을 꿇어 살려 주기를 빌고, 조조는 「나도 문원의 충의를 알아 장난했을 뿐」이라며 몸소 결박을 풀어 줍니다. 장료는 항복해 중랑장과 관내후가 되고 장패를 불러들입니다.
제25회에서는 토산에 에워싸인 관우를 찾아가 지금 죽으면 세 가지 죄를 짓는다며 달래고, 관우가 내건 세 가지 약속을 조조에게 전해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어 조조의 명으로 관우의 속을 떠보고 공을 세워 보답한 뒤 떠나겠다는 말을 그대로 아뢰며, 제26회에서는 문추를 쫓다가 그의 화살에 말이 쓰러져 땅에 떨어집니다. 제27회에서는 떠나는 관우를 먼저 쫓아가 조조의 전송을 받게 하고, 제28회에서는 관우를 막아선 하후돈을 조조의 명으로 말립니다. 제33회 백랑산에서는 조조의 깃발을 받아 오환의 우두머리를 베어 떨어뜨립니다. 제49회 적벽에서는 불타는 배에서 조조를 작은 배로 옮겨 태우고 다가오는 황개를 활로 쏘아 물에 떨어뜨리며, 제50회 화용도에서 관우는 조조를 따라온 장료를 보고 옛정이 움직여 모두를 놓아 줍니다. 조조는 돌아가며 합비를 장료에게 맡기고 악진과 이전을 부장으로 붙입니다.
제53회에서는 합비로 쳐들어온 손권의 군과 싸워 태사자와 칠팔십 합을 겨루고, 그날 밤 성안에서 불이 나며 반란의 외침이 일자 「어찌 온 성이 다 배반하겠는가」 하며 친병들과 길에 버티고 서서 내통한 자를 베고, 성문을 열어 태사자를 끌어들인 뒤 화살을 퍼붓습니다. 제67회에서는 조조의 교령을 받고 굳게 지키자는 악진과 말이 없는 이전 앞에서 홀로라도 나가 싸우겠다며 이전을 따르게 하고, 이전을 소요진 북쪽에 숨겨 소사교를 끊게 한 뒤 이천여 기로 손권을 뒤쫓습니다. 손권은 다리를 뛰어넘어 겨우 벗어나고, 연의는 이 싸움으로 강남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해 장료의 이름을 들으면 아이도 감히 밤에 울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제68회 유수에서는 악진을 내보내 능통과 싸우게 하고 서황과 함께 손권을 에워쌉니다. 마지막은 제86회로, 황초 5년 조비의 남정에서 정봉의 화살을 허리에 맞고 허창으로 돌아가 상처가 터져 죽고 조비가 후히 장사 지냅니다. 연의에서 장료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형 장범 · 아들 장호 · 손자 장통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합비의 장문원이다!
장문원이오. 군말은 하지 않겠소.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 드리겠소.
…합비에서도 이러지는 않았소.
숨을 고르고 다시 하겠소.
팔백으로 십만을 흔든 사람이오.
…내 이름에 흠이 가는구려.
합비의 이름을 잊지 마라.
…팔백으로도 될 때가 있었건만.
합비의 이름… 잊지들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