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언사(彥士) · 241년 ~ 260년 · 예주 패국 초현 · 조조 휘하
태학에서 박사를 따져 묻고 사마소에 맞서 칼을 든 위의 황제
출전 ·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고귀향공기와 평 · 배송지 주의 『위략』 · 『위씨춘추』 · 『한진춘추』 · 조모의 문집 · 위서 후비전 · 왕숙전 · 『진서』 경제기 · 문제기
조모는 자가 언사이며 위 문제 조비의 손자이자 동해정왕 조림의 아들입니다. 정시 5년(244) 고귀향공에 봉해졌습니다. 『삼국지』 삼소제기는 그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고 일찍 깨쳤다고 적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그의 문집에는 스스로 태어난 날을 적은 글이 있는데, 정시 3년(242) 9월에 태어났고 그때 누런 기운이 집에 서려 빛났다고 했습니다. 본문이 적은 죽을 때의 나이 스물과는 한 해가 어긋납니다.
가평 6년(254) 대장군 사마사가 황제 조방을 폐하자 공경들은 고귀향공을 맞아 세우기로 의논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사마사는 처음 팽성왕 조거를 세우려 했으나, 황태후가 팽성왕은 자신의 숙부라 그가 서면 자신이 설 곳이 없고 명제의 뒤도 끊긴다며 문제의 맏손자이자 명제의 조카인 고귀향공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서』 경제기도 태후가 팽성왕은 차례가 맞지 않는다며 고귀향공을 세우려 했고 사마사가 굳이 다투다 따랐다고 적습니다. 하남윤 왕숙 등이 법가를 받들고 원성으로 가서 그를 맞았습니다.
10월 현무관에 이른 그는 앞 전각에 머물라는 청을 선제가 쓰던 곳이라며 물리치고 서쪽 곁채에 머물렀습니다. 이튿날 낙양에 들어 서액문 남쪽에서 신하들이 절하자 수레에서 내려 답례하려 했고, 의례를 맡은 이가 「의례상 절하지 않습니다」 하자 「나는 신하다」 하며 답례했습니다. 지거문에서는 예전에는 수레를 탄 채 들어갔다는 말에 「나는 황태후의 부름을 받았을 뿐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른다」 하며 걸어서 태극전 동당에 이르러 태후를 뵈었습니다. 그날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위씨춘추』는 조회가 끝난 뒤 사마사가 어떤 임금이냐고 묻자 종회가 「재주는 진사왕과 같고 무예는 태조와 비슷하다」고 답했다고 적습니다. 그는 연호를 정원으로 고치고 수레와 옷, 후궁의 씀씀이를 줄였습니다.
정원 2년(255) 관구검과 문흠이 일어나 사마사가 나가 쳤고,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자 2월 위장군 사마소를 대장군으로 삼아 상서의 일을 거느리게 했습니다. 그해 8월 옹주자사 왕경이 조수 서쪽에서 강유에게 크게 지자, 「내가 덕이 적어 도적을 막지 못했다」는 조서를 내려 죽거나 사로잡힌 장졸의 집을 위로하고 한 해 부역을 덜어 주었으며, 11월에는 싸움터와 물가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묻게 했습니다.
감로 원년(256) 2월 그는 태극전 동당에서 순의 · 최찬 · 원량 · 종육 · 우송 등과 예법을 강론하다가 하의 소강과 한 고조 가운데 누가 나은지 물었습니다. 신하들이 고조가 낫다고 하자, 나라를 잃은 뒤 몸만 빠져나왔으나 덕으로 우임금의 업을 되살린 소강을 더 높여야 한다고 논했고 신하들이 모두 따랐습니다. 우송이 이를 글로 남기자고 하자 「내 배움이 넓지 못하다」며 뒷날의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했고, 그 논의는 시랑 종회가 물러나 엮었습니다. 4월에는 태학에 가서 여러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역』의 박사 순우준에게는 복희가 수인씨의 그림을 따라 역을 지었다면 공자는 왜 「수인씨가 죽고 복희씨가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그가 답하지 못했고, 정현이 단전과 상전을 경문에 붙인 것이 배우는 이에게 편하다면 공자는 왜 붙이지 않았느냐고 거듭 따졌습니다. 이어 『상서』의 박사 유준과는 요임금이 곤을 아홉 해나 쓴 일을, 『예기』의 박사 마조와는 덕과 예로 다스리는 일을 두고 문답했습니다.
감로 2년(257) 5월 벽옹에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을 때 시중 화유 · 상서 진건 등이 늦게 지어 파면하자는 아룀이 올랐으나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달 제갈탄이 수춘에서 일어나자 「황태후와 짐이 잠시 함께 군에 임하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항에 머물렀고, 이듬해 2월 사마소가 수춘을 떨어뜨렸습니다. 5월 사마소를 상국으로 삼아 진공에 봉하고 구석을 더했으나 사마소가 아홉 번 사양해 그쳤습니다. 8월에는 왕상을 삼로, 정현의 손자 정소동을 오경으로 삼아 몸소 신하들을 이끌고 옛 예를 행했습니다. 감로 4년(259) 정월 영릉현의 우물에 황룡 둘이 나타났습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모두 길조라 했으나 그는 「용은 임금의 덕인데 위로 하늘에도 아래로 밭에도 있지 않고 자꾸 우물에 웅크리니 좋은 조짐이 아니다」 하며 잠룡의 시를 지어 스스로를 풍자했고, 사마소가 이를 보고 미워했습니다.
감로 5년(260) 5월 조모가 죽었습니다. 본문은 「고귀향공이 죽었다. 나이 스물이었다」고만 적고, 배송지는 차례가 가장 잘 잡힌 『한진춘추』를 먼저 실었습니다. 권세가 날로 떠나는 것을 참지 못한 그는 시중 왕침, 상서 왕경,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안다. 앉아서 폐위의 욕을 받을 수 없으니 오늘 그대들과 함께 몸소 나가 치겠다」고 했습니다. 왕경이 계씨를 참지 못하다 나라를 잃은 노나라 소공의 일을 들어 말렸으나, 그는 품속의 판령을 땅에 던지며 「결심했다. 죽는다 한들 무엇이 두려우랴. 하물며 꼭 죽는 것도 아니다」 하고 태후에게 아뢰러 들어갔고, 그사이 왕침과 왕업은 사마소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그는 종과 하인 수백을 이끌고 북을 치며 나섰습니다. 동지거문에서 사마소의 아우 사마주의 무리는 꾸짖는 소리에 흩어졌으나 남궐 아래에서 중호군 가충이 맞섰습니다. 그가 몸소 칼을 휘두르자 무리가 물러서려 했고, 태자사인 성제가 어찌하느냐고 묻자 가충은 「너희를 길러 온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다」 했습니다. 성제가 나아가 찌르니 칼날이 등으로 나왔습니다. 사마소는 크게 놀라 땅에 몸을 던지며 「천하가 나를 무어라 하겠는가」 했고, 태부 사마부는 달려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곡하며 「폐하를 죽게 한 것은 신의 죄」라고 했습니다.
태후는 영을 내려 그가 태후를 해치려 했다며 한의 창읍왕처럼 서민의 예로 장사하라 했으나, 사마부 · 사마소 · 고유 · 정충이 왕의 예로 장사하자고 청해 따랐습니다. 『한진춘추』는 낙양 서북 서른 리 전수와 간수 가에 묻을 때 수레 몇 대에 깃발도 없었고, 모여든 백성이 「지난날 죽임을 당한 천자」라 했고 얼굴을 가리고 우는 이도 있었다고 적습니다. 사마소는 성제에게 대역의 죄를 씌워 그 집안을 정위에 넘겼고, 『진서』 문제기는 상서복야 진태가 가충을 허리 베어야 천하에 조금이나마 사죄할 수 있다고 했다고 적습니다. 왕경도 이 일로 죽었고, 뒤는 상도향공 조황이 이었습니다. 진수는 「고귀공은 재주와 슬기가 일찍 이루어졌고 묻기를 좋아하고 글을 숭상했으니 문제의 풍류다. 그러나 가볍고 조급하며 성을 함부로 내어 스스로 큰 화를 밟았다」고 평했습니다.
高貴公才慧夙成,好問尚辭,蓋亦文帝之風流也;然輕躁忿肆,自蹈大禍司馬昭之心,路人所知也『삼국연의』 제109~111회 · 제114회
연의에서 조모는 제109회에 처음 나옵니다. 사마사가 조방을 폐하고 팽성왕 조거를 세우려 하자, 태후는 팽성왕은 자신의 숙부라 그를 세우면 감당할 수 없다며 문제의 손자 고귀향공 조모가 온화하고 공손하며 사양할 줄 안다고 그를 세우게 하고, 사마사의 집안 숙부 사마부가 그 말이 옳다고 거듭니다. 원성에서 불려 온 조모는 서액문 밖에서 절하는 문무관에게 황급히 답례하고, 태위 왕숙이 「주상께서는 답례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하자 「나도 신하인데 어찌 답례하지 않겠소」 합니다. 수레를 사양하고 걸어서 태극 동당에 이르러 사마사에게 먼저 절하고, 태후는 「어려서 보니 제왕의 상이 있었다」며 공손하고 검소하게 덕을 펴라고 이릅니다. 그날 새 임금이 되어 연호를 정원으로 고칩니다.
제110회에서 사마사가 죽자 조모는 사마소에게 허창에 머물라는 조서를 보내지만, 사마소가 군을 이끌고 낙수 남쪽으로 돌아오자 크게 놀랍니다. 왕숙의 권으로 사마소를 대장군 · 녹상서사로 봉하고, 이로부터 안팎의 일이 모두 사마소에게 돌아갑니다. 제111회에서는 사마소가 제갈탄을 치러 가며 태후와 천자도 함께 가야 한다고 청하자 「대장군이 천하의 군마를 거느리는데 어찌 짐이 꼭 가야 하오」 하다가 위세에 눌려 따릅니다.
제114회에서 가충은 조모가 영릉의 우물에 나타난 황룡을 두고 지은 「잠룡시」를 사마소에게 일러바칩니다. 시는 용이 하늘로도 밭으로도 가지 못하고 우물 바닥에 웅크린 채 미꾸라지와 드렁허리가 그 앞에서 춤춘다고 읊습니다. 감로 5년 4월 사마소는 칼을 찬 채 전각에 올라 진공과 구석을 받아 내고, 시에서 자기들을 미꾸라지와 드렁허리로 보았느냐고 따집니다. 후궁으로 돌아간 조모는 왕침 · 왕경 · 왕업을 불러 울며 「사마소가 찬역을 품은 것은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하고, 왕경이 노 소공의 일을 들어 말리자 「이것을 참는다면 무엇을 못 참겠소. 죽은들 무엇이 두렵겠소」 합니다. 왕침과 왕업은 사마소에게 알리러 가고, 왕경은 「주상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되고, 주상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다」며 따르지 않습니다.
조모는 호위 초백에게 궁중의 숙위와 하인 3백여 명을 모으게 해 북을 치며 나서고, 칼을 짚고 수레에 올라 남궐로 향합니다. 왕경이 수레 앞에 엎드려 「양을 몰아 범의 입에 넣는 것」이라 울며 말려도 듣지 않습니다. 가충이 성제 형제와 철갑 금병 수천을 이끌고 오자 조모는 「나는 천자다. 너희가 궁정에 뛰어들어 임금을 죽이려 하느냐」 하고 꾸짖고, 금병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충이 「사마공께서 너희를 기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다」 하자 성제는 죽일지 묶을지 묻고, 가충은 죽은 것만 원하신다고 답합니다. 「필부가 감히 무례하냐」는 꾸짖음이 끝나기도 전에 성제의 극이 조모의 가슴을 찔러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고, 다시 찌른 칼날이 등으로 나오며, 초백도 성제의 극에 죽습니다. 사마부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곡하고, 진태가 가충을 베라 하자 사마소는 성제의 삼족을 멸합니다. 사마부의 청으로 왕의 예로 장사하고, 6월 상도향공 조황이 새 임금이 되는데 연의는 그가 이름을 조환으로 고쳤다고 적습니다. 연의에서 조모가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강유는 사마소가 임금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위를 칠 명분이 생겼다며 다시 군을 일으킵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할아버지 문제 조비 · 아버지 동해정왕 조림 · 황후 변씨(변융의 딸)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고귀향공 조모, 신하로서 왔소.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아오. 그대는 어느 편이오?
그 말이 옳다면, 공자는 어찌 그리 적지 않았소?
…앉아서 폐위의 욕을 받을 수는 없소.
숙위는 비고 군사는 약하오. 그래도 가겠소.
옛 뜻은 넓고 깊으나, 물음 앞에서는 숨지 못하오.
내 배움이 넓지 못했구려. 뒷날의 웃음거리가 되겠소.
꾸짖는 소리에 무리가 흩어졌다. 남궐로 가자!
천자가 칼을 들었거늘, 끝내 길이 막혔구나.
죽는다 한들 무엇이 두려우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