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백기(伯岐) · 미상 ~ 254년 · 익주 파군 남충국현 · 유비 휘하
월수를 열다섯 해 다스리고 병든 몸으로 북벌에 나서 싸우다 죽은 장수
출전 · 『삼국지』 촉서 장억전과 배송지 주의 『익부기구전』 · 『촉세보』 · 마충전 · 후주전 · 강유전 · 『화양국지』 남중지 · 유후주지
장억은 자가 백기이며 파군 남충국 사람입니다. 배송지가 끌어온 『익부기구전』은 그가 외롭고 한미한 집안에서 났으나 젊어서부터 트이고 굳센 절개가 있었다고 적습니다. 스무 살에 현의 공조가 되었는데, 유비가 촉을 평정할 무렵 산적이 현을 치자 현장이 집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장억은 칼날을 무릅쓰고 현장의 부인을 업고 빠져나와 살렸습니다. 이 일로 이름이 나서 주의 종사로 불려 갔습니다.
건흥 5년(227) 제갈량이 한중에 머물 때 광한 면죽의 산적 장모 등이 군수품을 약탈하자, 도위였던 장억은 그들이 새처럼 흩어져 싸움으로는 잡기 어렵다고 헤아려 거짓으로 화친하고 술자리를 벌인 뒤, 술이 무르익자 몸소 부하들을 이끌고 장모 등 쉰여 명의 목을 베어 열흘 만에 고을을 맑게 했습니다. 뒤에 병이 깊었으나 집이 본디 가난하자, 평소 가깝지 않던 광한태수 하지를 몸소 찾아가 병을 맡겼고 하지는 정성껏 치료해 몇 해 만에 낫게 했습니다.
아문장이 되어 마충에게 속해 북으로 문산의 반란한 강족을 치고 남으로 네 군의 만이를 평정했는데, 그때마다 계책을 세워 싸워 이긴 공이 있었습니다. 『익부기구전』은 그가 문산에서 강족이 험한 목에 쌓은 돌문을 칠 수 없다고 보고 통역을 보내 달래어 길을 얻었고, 남이의 유주를 칠 때는 싸울 때마다 앞장섰다고 적습니다. 건흥 14년(236) 무도의 저족 왕 부건이 항복을 청하고도 늦어지자 장억은 그 아우가 교활해 무리가 갈라진 탓이라고 헤아렸는데, 과연 아우는 위로 가고 부건만 왔습니다.
월수군은 제갈량이 고정을 친 뒤로도 수이가 여러 번 들고일어나 태수 공록과 초황을 죽였고, 그 뒤 태수들은 감히 군에 들지 못하고 팔백여 리 떨어진 현에 머물러 군은 이름만 남아 있었습니다. 옛 군을 되찾자는 논의 끝에 장억이 월수태수가 되니, 후주전은 이 일을 연희 3년(240) 봄에 적습니다. 장억은 거느린 군사를 이끌고 군으로 들어가 은혜와 정으로 달래어 만이들이 많이 와서 붙었습니다. 북쪽 변경에서 가장 사나운 착마족은 가서 쳐 그 우두머리 위랑을 산 채로 묶었다가 풀어 주어 남은 무리를 달래게 하고, 표를 올려 그를 읍후로 삼게 하니 삼천여 호가 편안히 부역을 바쳤습니다. 이 공으로 장억은 관내후가 되었습니다.
소기의 읍군 동봉이 항복했다가 다시 반란하자 장억은 그를 베었고, 서쪽 변경으로 달아난 아우 백거가 사람을 거짓으로 항복시켜 소식을 캐자 도리어 그들을 부려 백거를 죽이게 했습니다. 공록을 제 손으로 죽인 이구승도 잡아 지난 죄를 따져 베었습니다. 군에서 삼백여 리 떨어진 정작 · 태등 · 비수 세 현은 예부터 소금과 쇠와 옻이 났으나 오랑캐가 오래 차지하고 있었는데, 장억은 이를 빼앗아 관리를 두었습니다. 버티던 정작의 우두머리 낭잠은 잡아 와 매질해 죽이고 주검을 무리에게 돌려보내며 후히 상을 내려 타이르니, 무리가 모두 몸을 묶고 잘못을 빌어 소금과 쇠를 얻고 쓸 기물이 넉넉해졌습니다.
군에는 모우 땅을 지나 성도로 가는 평탄하고 가까운 옛길이 있었으나, 모우가 길을 끊은 지 백여 년이라 험하고 먼 안상으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장억은 모우의 우두머리 낭로에게 재물을 보내고 그 고모를 시켜 뜻을 전하게 했고, 낭로가 형제와 처자를 이끌고 찾아오자 맹세를 맺고 옛길을 열었습니다. 천 리가 맑아지고 옛 역참이 되살아났으며, 후주는 장억에게 무융장군을 더하고 군은 그대로 맡겼습니다.
장억은 대장군 비의가 새로 붙은 이를 지나치게 믿는 것을 보고 옛날 자객에게 해를 입은 잠팽과 내흡을 거울삼으라는 글을 보냈는데, 비의는 과연 위에서 항복해 온 곽수에게 죽었습니다. 또 오의 태부 제갈각이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자 그 사촌 아우 제갈첨에게 글을 보내, 어린 임금을 두고 적지로 나가는 것은 좋은 꾀가 아니니 군사를 돌려 농사를 넓히라고 권하게 했습니다. 제갈각은 끝내 이 일로 일족이 멸해졌으니, 진수는 장억의 식견이 대개 이러했다고 적습니다.
장억은 월수에 열다섯 해 머물며 고을을 평안하게 했고, 여러 번 청한 끝에 연희 17년(254) 성도로 불려 갔습니다. 이민족 백성들이 수레바퀴를 붙들고 울었고, 모우의 읍군은 아이를 업고 맞으러 나왔으며, 촉군의 경계까지 뒤따라와 그를 따라 조공하러 간 우두머리가 백여 명이었습니다. 탕구장군이 된 그를 선비들은 뜻이 크고 굳세다며 높였으나, 거리낌이 없고 예를 가볍게 여긴다고 헐뜯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해 위의 적도현장 이간이 몰래 항복을 청하자 여럿이 의심했으나 장억은 틀림없다고 했고, 위장군 강유가 장억 등을 이끌고 농서로 나갔습니다. 『익부기구전』은 풍습병이 깊어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서던 그가 스스로 청해 따라나섰고, 떠나며 후주에게 「양주를 평정하면 신은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되고, 이기지 못하면 몸을 죽여 보답하겠습니다」 하니 후주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합니다. 적도에 이르자 이간이 성의 관리와 백성을 이끌고 나와 맞았고, 군이 더 나아가 위의 장수 서질과 맞붙었을 때 장억은 싸움터에서 죽었으나 그가 죽이고 다치게 한 적도 곱절이 넘었습니다. 강유전은 이 싸움을 양무를 에워쌀 때의 일로 적는데, 서질이 죽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맏아들 장영은 서향후에 봉해지고 둘째 장호웅이 작위를 이었습니다. 월수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듣고 슬피 울며 사당을 세워 철마다, 가물거나 물이 들 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익부기구전』은 그의 생김과 말씨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으나 꾀는 셈에 들 만하고 과감함은 위엄을 세울 만했다고 기렸고, 『촉세보』는 손자 장혁이 진의 양주자사가 되었다고 적습니다. 진수는 「장억은 식견과 결단이 밝고 과감했다」고 평했습니다.
張嶷識斷明果余觀張嶷儀貌辭令,不能駭人,而其策略足以入算,果烈足以立威『삼국연의』 제87~105회 · 제109회 · 제111회
연의에서 장억은 제87회에 제갈량의 남쪽 정벌을 따르는 장수로 처음 나옵니다. 세 동의 원수가 세 길로 쳐 오자 장억은 제갈량의 명으로 장익과 함께 산길에 숨어 있다가, 달아나던 동도나를 사로잡아 옵니다. 맹획을 쫓을 때도 장익과 함께 좌우에서 뛰쳐나와 돌아갈 길을 끊습니다. 제90회에서는 맹획의 아내 축융부인과 맞붙었다가 달아나는 척하는 부인을 쫓던 중 공중에서 날아온 칼에 왼팔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사로잡히고, 제갈량이 사로잡은 축융부인과 맞바꾸어 마충과 함께 풀려납니다. 그 뒤 반사곡에서는 마충과 함께 항복한 이민족 군사를 이끌고 좌우에서 나와 맹획의 무리를 사로잡습니다.
제91회에서 제갈량이 북벌에 나설 때 장억은 무융장군 · 관내후로 이름을 올리고, 제97회 진창에서는 위의 장수 왕쌍과 싸우다 달아나는 척하는 그를 쫓다 유성추에 등을 맞아 피를 토하고 왕평과 요화에게 구해집니다. 제99회에서는 왕평과 함께 천 명으로 진창의 옛길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적은 군사로 어찌 막느냐고 되묻지만, 제갈량이 헤아린 대로 큰비가 한 달 내내 내려 위군은 깊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제102회에서는 왕평과 함께 앞장서 위수 가의 진영을 치다 크게 꺾이고, 이어 제갈량의 명으로 오백 군사에게 귀신의 탈을 씌우고 얼굴에 물감을 칠한 육정육갑의 신병으로 꾸며 목우유마를 몰고 가며 곽회의 군사를 놀라게 합니다.
제104회에서 제갈량은 죽기 전 양의에게 장억을 충의로운 장수의 하나로 부탁하고, 제105회에서 장완은 오를 막으려 왕평과 장억을 영안에 두자고 아룁니다. 제109회에서 강유가 다시 위를 칠 때 장억은 군량을 대는 운량사가 됩니다. 그의 마지막은 제111회입니다. 단곡에서 등애의 복병에 크게 진 강유가 물러나다 진태의 군에 겹겹이 에워싸이자, 탕구장군 장억이 수백 기를 이끌고 뛰어들어 강유를 빼내고 자신은 어지러이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한중으로 돌아간 강유는 그의 충성과 용맹을 기려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달라고 표를 올립니다. 연의에서 장억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월수를 다스린 일은 연의에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맏아들 장영 · 둘째 장호웅 · 손자 장혁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월수의 장억이오.
가난한 집에서 났소. 그것이 흠이오.
십오 년을 들여 길 하나를 열었소.
…월수 사람들이 도성까지 따라왔소.
몸이 성치 않으나 갈 수는 있소.
믿음으로 얻은 것은 오래가오.
서두른 것이 허물이오.
오래 걸려도 길은 열리는 법이오.
몸이 먼저 무너졌소.
목숨으로 갚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