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영칙(令則) · 미상 ~ 270년 · 형주 양양군 · 유비 휘하
촉이 망한 뒤에도 오의 포위를 견디며 영안을 지킨 장수
출전 · 『진서』 나헌전과 사신의 평 · 『삼국지』 촉서 곽익전과 배송지 주의 『양양기』 · 초주전 배송지 주의 손성 논평 · 오서 손휴전 · 『화양국지』 유후주지
나헌은 자가 영칙이며 양양 사람입니다. 『진서』 나헌전은 아버지 나몽이 촉의 광한태수였다고 적고, 배송지 주에 인용된 『양양기』는 나몽이 난리를 피해 촉으로 들어가 광한태수에 이르렀다고 적습니다. 나헌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났고 열세 살에 글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초주의 문인들은 그를 공자의 제자 자공이라 일컬었습니다. 『진서』는 그의 성품이 바르고 밝으며 엄정했고, 선비를 대하는 데 게으름이 없었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고 살림을 꾸리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양양기』에 따르면 후주가 태자를 세우자 태자사인이 되었고, 태자서자와 상서이부랑을 거쳐 선신교위로 두 번 오에 사신으로 가서 오나라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후주가 태자를 세운 것은 연희 원년(238)이고, 『삼국지』 초주전은 이때 초주도 태자복이 되었다가 가령으로 옮겼다고 적습니다. 그 무렵 환관 황호가 정사에 끼어들자 많은 이가 그에게 붙었으나 나헌만은 홀로 어울리지 않았고, 이에 노한 황호가 그를 파동태수로 밀어냈습니다. 그때 우대장군 염우가 파동을 도독하고 있었는데, 후주는 나헌을 염우의 버금으로 삼았습니다. 『화양국지』는 경요 원년(258) 정북대장군 종예가 영안에서 불려 간 뒤 나헌이 영군으로 영안의 일을 맡았다고 적습니다.
경요 6년(263) 위가 촉을 치자 조정은 염우를 서쪽으로 불러들이고, 염우의 군사 2천 명을 남겨 나헌에게 영안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곧 성도가 무너졌다는 소문이 들려 성안이 술렁이고 강가의 장리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나헌이 성도가 어지럽다고 말을 퍼뜨린 자 한 사람을 베자 백성이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후주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이르자 그는 거느린 이들을 이끌고 도정에서 사흘 동안 곡했습니다.
오나라는 촉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서쪽으로 올려 보냈는데, 겉으로는 구원을 내세웠으나 속으로는 나헌을 덮치려 했습니다. 『진서』는 이때 온 장수를 성헌이라 적습니다. 나헌은 「본조가 기울어 엎어졌는데, 오는 입술과 이 같은 사이이면서 우리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그 이익을 노리니, 내가 어찌 항복한 포로가 되겠는가」 하고, 갑옷을 손보고 장수와 군사들에게 절의를 다짐하게 하니 모두 목숨을 바쳐 따랐습니다. 『양양기』는 그가 「한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오가 어찌 오래가겠는가」라는 말도 했다고 적습니다.
이듬해(264) 종회와 등애가 죽어 촉의 여러 성에 주인이 없게 되자 오는 촉을 아우를 뜻을 품고 보협에게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 했습니다. 나헌은 강가에서 활을 쏘아 막다가 막아 내지 못하자 참군 양종을 보내 포위를 뚫고 북으로 나가 안동장군 진건에게 위급을 알리게 하고, 문무 관원의 인수와 볼모로 삼을 아들을 진왕에게 보냈습니다. 보협이 성을 치자 나헌은 나가 싸워 그 군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노한 오의 임금 손휴는 다시 육항 등에게 3만 명을 이끌고 가서 포위를 더하게 했습니다. 『삼국지』 오서 손휴전은 영안 7년(264) 2월 진군장군 육항 · 무군장군 보협 · 정서장군 유평 · 건평태수 성만이 촉의 파동 수장 나헌을 에워쌌다고 적습니다. 『양양기』는 포위가 여섯 달에 이르렀다 하고 『진서』는 해를 넘겨 막았다고 적는데, 구원은 오지 않고 성안 사람의 태반이 병에 걸렸습니다. 어떤 이가 남쪽 장가로 나가거나 북쪽 상용으로 달아나면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권하자, 나헌은 「남의 주인이 된 자는 백성이 우러르는 바이다. 지키지 못하고 다급하다고 버리는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 일이니, 여기서 목숨을 마치겠다」고 했습니다. 진건의 말을 들은 진왕이 형주자사 호열을 보내 나헌을 구하게 했고, 손휴전은 그해 7월 위의 장군 호열이 보병과 기병 2만으로 서릉을 쳐서 나헌을 구하자 육항 등이 군을 물렸다고 적습니다.
『삼국지』 곽익전은 이해 촉이 위에 아울러지자 곽익과 파동영군 양양 사람 나헌이 저마다 한 지방을 온전히 지켜 들어 귀부하니, 모두 앞의 자리를 그대로 맡고 대우가 더해졌다고 적습니다. 『양양기』에 따르면 진왕은 그에게 앞의 자리를 맡기고 능강장군으로 삼아 만년정후에 봉했으며, 마침 무릉의 네 현이 무리를 들어 오에 등을 돌리자 그를 무릉태수 · 파동감군으로 삼았습니다. 태시 원년(265) 진이 서자 서악현후로 봉작이 바뀌었고, 처자를 낙양에 살게 하자 무제는 아들 나습을 급사중으로 삼았습니다. 태시 3년(267) 겨울 조정에 들어가 관군장군 · 가절이 되었습니다.
태시 4년(268) 3월 무제를 따라 화림원 잔치에 나갔는데, 무제가 촉 대신의 자제를 묻고 이어 때맞추어 쓸 만한 선배를 묻자 나헌은 촉군의 상기 · 두진 · 수량, 파서의 진수, 남군의 고궤, 남양의 여아 · 허국, 강하의 비공, 낭야의 제갈경, 여남의 진유를 천거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곧 쓰여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진서』는 무제가 「나헌은 충렬하고 굳세며 재주와 꾀와 그릇이 있으니 고취를 내려 줄 만하다」는 조서를 내리고 산현옥으로 꾸민 패검을 내렸다고 적습니다. 나헌은 돌아가서 오의 무성을 습격해 빼앗고 오를 칠 계책을 올렸습니다.
태시 6년(270)에 죽었고, 안남장군을 추증받았으며 시호를 열이라 했습니다. 『진서』는 사지절 · 안남장군 · 무릉태수를 추증하고 서악후로 추봉했다고 적어, 살아서 서악현후가 되었다는 『양양기』와 어긋납니다. 아들 나습은 능강장군으로 아버지의 부곡을 거느렸는데, 『진서』는 광한태수에 이르렀다 하고 『양양기』는 일찍 죽어 광한태수로 추증되었다고 적습니다. 형 나식의 아들 나상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나헌에게 의지해 자랐으며 뒤에 익주자사가 되었습니다.
『진서』의 사신은 나헌과 오의 등수를 함께 두고 나라의 운이 기울어 본조가 지킴을 잃자 도정에 모여 크게 곡했다며 「옛 충렬 가운데도 이들에 견줄 이가 드물다」고 평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손성은 후주의 항복을 나무라며 「이때 나헌은 무거운 군사로 백제를 지키고, 곽익은 굳센 군사로 야랑을 누르고 있었다」고 적어, 후주가 동쪽으로 물러나 뒷날을 도모할 길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夫為人主,百姓所仰,既不能存,急而棄之,君子不為也。畢命於此矣憲忠烈果毅,有才策器幹,可給鼓吹연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종강본 120회 어디에도 나헌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촉이 망한 뒤 영안성에서 오의 포위를 견딘 일도 소설은 다루지 않습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버지 나몽 · 아들 나습 · 조카 나상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영안의 나헌이오.
영안을 지키는 나헌이오. 이 성은 내주지 않소.
주인을 잃었다고 백성까지 버릴 수는 없소.
…성안에 병이 돌아도 성문은 닫아 두었소.
이웃의 난리로 이익을 노리는 자에게 무릎 꿇지 않소.
말로 지키는 성도 있는 법이오.
말은 졌으나 성은 아직 서 있소.
영안의 성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소.
지킬 것을 다 지키지 못했구려.
여기서 목숨을 마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