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군랑(君郎) · 미상 ~ 194년 · 형주 강하군 경릉현 · 유장 휘하
목을 두자 건의하고 익주에 들어가 딴 뜻을 키운 종실
출전 · 『삼국지』 촉서 유이목전(유언전 · 유장전과 평)과 배송지 주의 『속한서』 · 『한영제기』 · 『익부기구전』 · 『영웅기』 · 『전략』 · 촉서 목황후전 · 진밀전과 배송지 주의 『익부기구전』 · 맹광전 · 선주전 · 위서 장로전 · 『후한서』 유언전과 논 · 영제기 · 헌제기와 이현 주의 원굉 『기』 · 『화양국지』 공손술유이목지 · 한중지 · 광한군지
유언은 자가 군랑이며 강하 경릉 사람으로, 한나라 노 공왕의 후손입니다. 장제 원화 연간에 집안이 경릉으로 옮겨 봉해지면서 그 곁가지가 그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젊어서 주와 군에서 벼슬하다가 종실이라 하여 중랑이 되었고(『후한서』는 낭중으로 적습니다), 스승의 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었습니다. 양성산에 머물며 학문을 쌓아 가르쳤고, 현량방정으로 천거되어 사도부에 불려 간 뒤 낙양령 · 기주자사 · 남양태수 · 종정 · 태상을 지냈습니다.
영제의 정치가 쇠하고 왕실에 일이 많은 것을 본 유언은 「자사와 태수가 뇌물로 벼슬을 얻어 백성을 벗겨 먹으니 백성이 떨어져 나간다. 이름이 맑은 중신을 뽑아 목백으로 삼아 사방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속으로는 세상의 난리를 피하려고 교지목을 구했습니다. 건의가 곧 시행되지 않던 차에 광한 사람인 시중 동부가 몰래 「도읍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고, 익주의 분야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유언은 뜻을 익주로 돌렸습니다. 마침 익주자사 극검이 세금을 어지럽게 거두어 원성이 멀리까지 들렸고 병주와 양주에서는 자사가 죽임을 당하자, 유언의 건의가 받아들여졌습니다. 『후한서』 영제기는 중평 5년(188)에 자사를 고쳐 처음 목을 두었다고 적습니다. 유언은 감군사자로 나가 익주목을 맡고 양성후에 봉해졌으며, 극검을 잡아 죄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후한서』는 이때 태복 황완이 예주목, 종정 유우가 유주목이 되었고 「주의 무거운 소임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적습니다. 동부는 촉군서부속국도위가 되기를 청했고, 태창령 조위도 벼슬을 버리고 함께 유언을 따랐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한영제기』는 유언이 명을 받고 길을 떠났으나 길이 통하지 않아 형주의 동쪽 경계에 머물렀다고 적습니다.
이 무렵 익주의 도적 마상 · 조지 등이 면죽현에서 스스로 황건이라 일컫고 부역에 지친 백성을 모아 하루 이틀 만에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면죽령 이승을 죽이고 낙현을 깨뜨린 뒤 자사 극검을 죽였고, 촉군과 건위까지 쳐서 한 달 사이에 세 군을 무너뜨렸으며, 마상은 스스로 천자라 일컬었습니다. 주의 종사 가룡은 건위 동쪽 경계에서 이끌던 군사 수백 명에 관리와 백성을 거두어 천여 명으로 마상을 쳤고, 며칠 만에 깨뜨려 주의 경계가 맑아지자 관리와 군사를 뽑아 유언을 맞이했습니다. 유언은 치소를 면죽으로 옮겨 떨어져 나간 이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운 은혜를 베풀었으나, 속으로는 딴 뜻을 꾀했습니다.
장로의 어머니는 귀도를 하고 얼굴이 젊어 늘 유언의 집을 드나들었고, 유언은 장로를 독의사마로 삼아 한중에 머물게 했습니다. 장로는 골짜기의 잔도를 끊고 한의 사자를 죽였고, 유언은 「미적이 길을 끊어 다시 통하지 못한다」고 조정에 글을 올렸습니다. 『화양국지』는 이 일을 초평 연간의 일로 적습니다. 유언은 또 다른 일을 핑계로 주의 호족 왕함 · 이권 등 열 남짓을 죽여 위엄과 형벌을 세웠는데, 『후한서』는 이 일로 선비와 백성이 모두 원망했다고 적습니다. 『후한서』가 초평 2년(191)에 두는 대로, 건위태수 임기와 가룡이 이 때문에 돌아서서 유언을 쳤으나 유언은 그들을 쳐서 둘 다 죽였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영웅기』는 유언이 군사를 일으켜 천하와 함께 동탁을 치지 않고 주를 지키기만 했으며, 동탁이 보낸 사도 조겸의 꾐에 넘어간 교위 가룡이 돌아서 유언을 치자 유언이 청강의 군사를 내보내 깨뜨렸다고 적습니다. 『화양국지』는 이 싸움에서 동주 사람들이 힘을 다했다고 하고, 『후한서』는 남양과 삼보에서 흘러든 백성 수만 호를 유언이 모두 거두어 「동주병」이라 했다고 적습니다.
유언의 뜻은 점점 커져 천자가 타는 수레를 천여 대나 만들었습니다. 형주목 유표는 유언에게 자하가 서하에서 성인으로 의심받은 것과 같은 논의가 있다고 조정에 아뢰었고, 『후한서』는 유표가 유언이 천자의 수레와 옷을 흉내 낸다고 아뢰었다고 적습니다. 이때 유언의 아들 가운데 맏아들인 좌중랑장 유범 · 치서어사 유탄 · 봉거도위 유장은 모두 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었고, 별부사마 유모만 유언을 따라와 있었습니다. 헌제가 유장을 보내 유언을 타이르게 하자 유언은 유장을 머물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는데, 배송지 주에 인용된 『전략』은 유언이 병을 핑계로 유장을 불렀다고 적습니다. 『삼국지』 목황후전에 따르면 진류 사람 오의(『삼국지』는 오일로 적습니다)의 아버지가 본디 유언과 옛 사귐이 있어 온 집안이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왔습니다. 딴 뜻을 품고 있던 유언은 관상을 잘 보는 이가 오의의 누이를 크게 귀해질 상이라 하자 그를 아들 유모의 아내로 맞았습니다.
정서장군 마등이 미에 주둔하다 돌아서자 유언과 유범은 마등과 꾀를 통해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치려 했습니다. 유범의 꾀가 새어 괴리로 달아났고, 마등이 져서 양주로 물러나자 유범은 곧 죽임을 당했으며 유탄도 잡혀 형을 받았습니다. 『후한서』는 이 일을 흥평 원년(194)에 두고 유언이 수병 5천을 보내 도왔다고 적으며, 헌제기는 그해 3월 마등과 한수가 장평관에서 져서 좌중랑장 유범이 싸우다 죽었다고 적습니다. 『화양국지』는 이 일을 초평 4년(193)에 두고, 치중종사 왕상이 거듭 말렸으나 유언이 듣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의랑 방희는 유언과 대대로 사귄 집안이라 유언의 손자들을 데리고 촉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무렵 하늘에서 내린 불이 유언의 성을 태워 수레가 모두 타 버렸고 불은 백성의 집에까지 번졌습니다. 유언은 치소를 성도로 옮겼으나, 두 아들을 잃은 아픔에 재앙까지 겹쳐 흥평 원년(194) 등에 난 종기가 터져 죽었습니다. 주의 큰 관리 조위 등은 유장이 온화하고 어진 것을 탐내 함께 그를 익주자사로 올렸고, 조서가 내려 유장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었습니다. 스무 해 뒤 유장은 성도를 유비에게 내주며 「아버지와 아들이 주에 있은 지 스무 해 남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언은 선비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광한의 진밀이 글을 올려 처사 임안을 천거하자, 배송지 주에 인용된 『익부기구전』에 따르면 유언은 임안을 「나라의 큰 보배」라 하여 조정에 천거했으나 길이 막혀 부르지 못했습니다. 진수는 「유언은 동부의 말을 듣고 익주 땅에 마음을 두었고, 관상가의 말을 듣고 오씨에게 혼인을 구했으며, 서둘러 수레와 옷을 만들어 천자의 자리를 훔치려 했으니 그 미혹됨이 심하다」고 평했습니다. 『후한서』를 쓴 범엽은 「유언은 때가 어려운 것을 보고 먼저 남보다 늦게 망할 곳을 구했으니, 기미를 보고 움직인 것에 가깝다」고 평했습니다.
劉焉聞董扶之辭則心存益土,聽相者之言則求婚吳氏,遽造輿服,圖竊神器,其惑甚矣劉焉睹時方艱,先求後亡之所,庶乎見幾而作『삼국연의』 제1회 · 제59회 · 제77회 · 제120회
연의에서 유언은 제1회에 처음 나옵니다. 장각의 한 갈래 군사가 유주의 경계를 범하자, 연의는 강하 경릉 사람이자 노 공왕의 후손인 유주태수 유언이 교위 추정을 불러 의논했다고 그립니다. 추정이 「적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으니 서둘러 군사를 모아 적을 맞으라」고 하자 유언은 의병을 모으는 방을 내걸었고, 그 방이 탁현에 이르러 유비를 끌어냅니다. 연의는 유언이 방을 붙였을 때 유비가 스물여덟 살이었다고 적습니다. 도원에서 결의한 유비 · 관우 · 장비가 마을 장정 오백여 명을 이끌고 추정을 찾아가자 추정은 그들을 태수 유언에게 데려가고, 유비가 종친의 갈래를 말하자 유언은 크게 기뻐하며 유비를 조카로 삼습니다.
며칠 뒤 황건의 장수 정원지가 군사 5만을 이끌고 탁군을 범하자 유언은 추정에게 유비 등 세 사람과 군사 오백을 이끌고 나가 막게 합니다. 유비 일행이 대흥산 아래에서 정원지를 베고 크게 이겨 돌아오자 유언은 몸소 나가 맞으며 군사들을 위로합니다. 이튿날 청주태수 공경이 황건에 에워싸여 구원을 청하는 글을 보내오자 유언은 유비와 의논하고, 추정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유비 · 관우 · 장비와 함께 청주로 보냅니다. 청주를 구한 뒤 추정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유비는 스승 노식을 도우러 광종으로 떠나니, 연의에서 유언이 몸소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뒤 연의는 제59회에서 유장을 소개하며 유언이 뒤에 익주목에 이르렀고 흥평 원년(194)에 등창으로 죽었으며, 익주의 관리 조위 등이 유장을 받들어 익주목으로 삼았다고 짧게 적습니다. 제77회에서는 법정이 한중왕 유비에게 오의의 누이를 왕비로 권하며, 관상가가 크게 귀해질 상이라 하여 앞서 유언의 아들 유모에게 허락했으나 유모가 일찍 죽었다고 말합니다. 연의에는 유언이 목을 두자고 건의한 일이나 장로를 한중에 보낸 일, 아들 유범 · 유탄을 잃은 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120회 끝의 옛 시는 「유언 부자가 파촉에 웅거했다」고 읊습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넷(유범 · 유탄 · 유모 · 유장) · 며느리 오씨(오의의 누이)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익주목 유언이오. 이 땅은 내가 지키오.
도읍은 곧 어지러워지오. 나는 먼저 물러설 땅을 골라 두었소.
말은 그럴듯하오. 허나 익주로 드는 길은 이미 끊겼소.
…천자의 기운이라 했지. 동부의 그 말이 아직 귀에 남았소.
수레를 천 대나 지었는데 탈 날은 끝내 오지 않는구려.
자사가 아니라 목이오. 이 땅의 일은 내가 정하오.
두 아들을 잃고 성마저 탔소. 하늘이 나를 꾸짖는구려.
길은 끊겼소. 촉의 문은 내가 열고 닫소.
하늘의 불이 수레를 다 태워 버렸구려.
범아, 탄아… 내가 너희를 잃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