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중업(仲業) · 미상 ~ 미상 (226년 이후) · 형주 남양군 완현 · 유표 휘하
항복하며 통곡한 진심으로 조조를 감동시키고 평생 강하를 지켜낸 철벽 맹장
출전 · 『삼국지』 위서 문빙전과 배송지 주의 『위략』 · 손성의 말 · 위서 무제기 · 명제기 · 삼소제기 · 하후상전 · 오서 오주전 · 주연전 · 육손전
문빙은 자가 중업이며 남양군 완현 사람입니다. 유표의 대장이 되어 북쪽을 막았습니다. 건안 13년(208) 유표가 죽고 아들 유종이 뒤를 이었는데, 조조가 형주를 치자 유종은 온 주를 들어 항복하며 문빙을 불러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문빙은 「저는 주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으니 죄를 기다릴 뿐입니다」라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조조가 한수를 건너자 그제야 찾아갔고, 조조가 「어찌 늦었는가」 하고 묻자 「지난날 유형주를 도와 나라를 받들지 못했고, 형주가 무너진 뒤에도 늘 한수를 지켜 땅을 온전히 하고자 했으니, 살아서는 외롭고 약한 이를 저버리지 않고 죽어서는 땅속에서 부끄럽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어 여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슬프고 부끄러워 일찍 뵐 낯이 없었습니다」라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조조는 슬퍼하며 「중업, 그대는 참된 충신이오」라 하고 후한 예로 대했습니다.
조조는 문빙에게 군사를 주어 조순과 함께 장판까지 유비를 뒤쫓게 했습니다. 형주를 먼저 평정하고 보니 강하가 오와 맞닿아 민심이 불안했으므로, 조조는 문빙을 강하태수로 삼아 북쪽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의 일을 맡게 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습니다. 무제기는 형주 사람들이 따른 공을 논해 열다섯 사람을 후로 봉하고, 유표의 대장 문빙을 강하태수로 삼아 본디 거느리던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고 적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손성은 장패는 젊어서 효성과 기개로, 문빙은 눈물을 흘린 정성으로 이름났기에 조조가 한 번 보고 두 방면의 일을 맡긴 것이지 다급한 사이에 씩씩함만 보고 알아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문빙은 악진과 함께 심구에서 관우를 쳐 공을 세워 연수정후로 올랐고 토역장군이 더해졌으며, 또 한진에서 관우의 군수품을 치고 형성에서 그 배를 불살랐습니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장안향후로 올라 가절을 받았습니다. 황초 3년(222) 하후상과 함께 강릉을 에워쌀 때는 따로 면구에 머물며 석범에 자리 잡고 한 부대를 맡아 적을 막은 공으로 후장군이 되고 신야후에 봉해졌습니다. 황초 7년(226) 조비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손권이 몸소 5만 무리를 이끌고 석양에서 문빙을 에워싸 형세가 매우 급했으나, 문빙은 굳게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고 손권은 스무 날 남짓 머물다 물러갔습니다. 문빙은 뒤쫓아 깨뜨렸고, 봉읍 5백 호를 더 받아 모두 1천9백 호가 되었습니다. 명제기는 조정이 구원병을 보내자고 하자 조예가 「손권은 물싸움에 익숙한데 배에서 내려 뭍에서 치는 것은 대비가 없는 틈을 노린 것이다. 이미 문빙과 맞섰으니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라 했고, 앞서 보낸 치서시어사 순우가 지나는 현의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 불을 올리자 손권이 물러갔다고 적습니다. 오서 주연전도 손권이 석양을 치고 돌아갈 때 뒤를 막던 반장이 쫓아오는 적을 막지 못해 주연이 돌아서서 막았다고 적습니다.
문빙은 강하에 수십 년 있으면서 위엄과 은혜가 있어 그 이름이 적국에 떨쳤고,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조정은 그의 봉읍을 나누어 아들 문대를 열후로 봉하고 조카 문후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습니다. 문빙이 죽자 장후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문대가 먼저 죽었으므로 양자 문휴가 뒤를 잇고 문휴가 죽자 그 아들 문무가 이었습니다. 죽은 해는 전하지 않으나, 삼소제기는 정시 4년(243) 7월 그를 태조의 사당 뜰에 모셔 함께 제사하게 했다고 적습니다. 육손전은 뒷날 위의 강하태수가 문빙의 아들 문휴와 오래 사이가 나빴고, 육손이 그 틈을 이용해 그 태수를 물러나게 했다고 적습니다. 가평 연간에 강하태수가 된 초군의 환우는 맑고 검소하며 위엄과 은혜가 있어 그 이름이 문빙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은 석양의 일을 달리 전합니다. 손권이 수만 무리를 이끌고 갑자기 이르렀을 때 큰비로 성의 목책이 무너지고 백성은 들에 흩어져 미처 손보지 못했으므로, 문빙은 잠잠히 있어 의심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 성안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자신도 방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손권은 「북쪽에서 이 사람을 충신이라 여겨 이 군을 맡겼는데, 내가 왔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니 은밀한 꾀가 있거나 반드시 밖에서 구원이 올 것이다」라며 감히 치지 못하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배송지는 『위략』의 이 말이 본전과 반대된다고 적었습니다. 진수는 이통 · 장패 · 문빙 · 여건이 주와 군을 지키며 모두 위엄과 은혜를 드러냈다고 평했습니다.
李通、臧霸、文聘、呂虔鎮衛州郡,並著威惠聘在江夏數十年,有威恩,名震敵國,賊不敢侵『삼국연의』 제34회 · 제41~42회 · 제48~50회 · 제56회 · 제71회 · 제86회
연의에서 문빙은 제34회에 처음 나옵니다. 채모가 양양의 잔치에서 유비를 해치려 할 때, 괴월의 꾀대로 왕위와 함께 바깥 대청에 따로 자리를 차려 무장들을 맞으며 조운을 붙잡아 두려 합니다. 제41회에서 유비가 양양 성문에 이르자 성문을 열어 준 위연에게 「대장 문빙을 알아보겠느냐」 하고 나와 맞서, 사시부터 미시까지 싸워 위연의 군사를 다 꺾습니다. 유종이 항복한 뒤 조조가 양양의 장수들 가운데 그만 보이지 않아 찾게 하자 늦게 나타나 「신하가 되어 주인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니 슬프고 부끄러워 일찍 뵐 낯이 없었다」며 흐느끼고, 조조는 「참된 충신」이라며 강하태수와 관내후를 내리고 길을 여는 앞장을 맡깁니다. 당양의 경산에서 유비를 가로막았다가 「주인을 저버린 도적이 무슨 낯으로 사람을 보느냐」는 꾸짖음을 듣고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가득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며, 제42회에서는 조운을 장판교까지 쫓다가 다리 위의 장비와 숲 뒤의 먼지를 보고 복병을 의심해 멈춥니다.
제48회 적벽에서는 수군의 왼쪽 군을 맡고, 초촉 · 장남을 도우러 순찰선을 이끌고 나갔다가 한당 · 주태에게 밀려 돌아옵니다. 제49회에서는 황개의 배를 막으러 나섰다가 왼팔에 화살을 맞아 쓰러지고, 제50회에서 모개가 그를 구해 옵니다. 제56회 동작대 잔치의 활쏘기에서는 조휴가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자 「승상의 비단 전포는 다른 성씨가 먼저 가져야 한다」며 나서 한가운데를 맞힙니다. 제71회 한수 싸움에서는 황충의 부장 장저를 가로막고, 그의 부장 모용렬이 조운에게 죽습니다. 제86회에서는 조비가 오를 칠 때 대장으로 나서고, 풍랑에 조비의 용주가 뒤집히려 하자 작은 배를 저어 와 조비를 업어 옮깁니다. 연의에서 문빙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석양의 싸움은 그리지 않습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문대(먼저 죽음) · 양자 문휴(뒤를 이음) · 손자 문무 · 조카 문후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형주의 옛 장수요.
강하를 맡은 사람이오. 여기는 넘지 못하오.
말은 짧게 하겠소. 나는 지킬 뿐이오.
…성문이 삐걱이는구려.
버티는 것이 내 일이오.
삼십 년을 지켰소. 하루도 내주지 않았소.
…옛 주공께 부끄럽구려.
강하는 오늘도 내 것이오.
…이 한 몸으로도 못 막았소.
강하는… 끝내 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