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경흥(景興) · 미상 ~ 228년 · 서주 동해국 담현 · 한 세력의 주인
손책에게 잡혔으나 위나라 삼공까지 오른 사마염의 외증조부
출전 · 『삼국지』 위서 왕랑전과 배송지 주의 『왕랑가전』 · 『헌제춘추』 · 『한진춘추』 · 『위략』 · 『위서』 · 『세어』 · 『삼국지』 위서 문제기 배송지 주의 『헌제전』 · 명제기 · 종요전 · 진군전 · 장홍전 · 오서 손정전 · 우번전 · 장소전 ·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의 『제갈량집』 · 『진서』 문명왕황후전
왕랑은 자가 경흥이며 동해군 사람입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은 본래 이름이 왕엄이었는데 뒤에 랑으로 고쳤다고 적습니다. 경전에 통달해 낭중이 되었고 치구현장으로 나갔습니다. 『삼국지』 장홍전은 그때 낭관들을 현장으로 내보내며 낭야의 조욱은 거현장, 동래의 유요는 하읍장, 동해의 왕랑은 치구장으로 삼았다고 적고, 장소전은 장소가 조욱 · 왕랑과 함께 일찍 이름이 나 서로 벗했다고 적습니다. 태위 양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양사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상복을 입었습니다. 효렴으로 천거되고 공부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서주자사 도겸이 그를 무재로 천거했습니다. 그때 헌제는 장안에 있고 관동에서 군사가 일어났는데, 도겸의 치중이던 왕랑은 별가 조욱 등과 함께 「제후의 도리는 천자에게 힘을 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며 사자를 보내라고 권했습니다. 조욱이 표를 받들고 장안에 가자 천자는 그 뜻을 기려 도겸을 안동장군으로 삼고, 조욱을 광릉태수, 왕랑을 회계태수로 삼았습니다. 『왕랑가전』은 회계에서 진시황을 나무로 새겨 하우와 한 사당에 모시던 것을 덕 없는 임금이라며 걷어 냈고, 네 해 동안 고을에 있으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적습니다.
건안 원년(196) 손책이 강을 건너 땅을 거두어 오자 공조 우번은 힘으로 막을 수 없으니 피하는 것이 낫다고 했지만, 왕랑은 한나라의 관리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며 군사를 일으켜 맞섰습니다. 손정전에 따르면 손책은 고릉에서 여러 번 물을 건너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손정이 남쪽 수십 리의 사독 길로 돌아 안쪽을 차지하자고 하자 밤에 군사를 나누어 사독 길로 고천둔을 쳤습니다. 크게 놀란 왕랑이 옛 단양태수 주흔 등을 내보냈으나 손책이 이들을 깨뜨려 베고 회계를 평정했습니다. 왕랑은 배를 띄워 동야까지 달아났으나 손책이 뒤쫓아 크게 깨뜨리자 손책에게 나아갔고, 손책은 그가 학식 있고 점잖은 선비라 하여 꾸짖기만 하고 해치지 않았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헌제춘추』는 교주로 달아나려다 쫓겨 항복한 왕랑이 사자의 힐책에 일찍 돌아오지 못한 죄는 죽어도 남는다며 스스로를 사로잡힌 몸이라 불렀다고 적습니다. 떠돌며 아침에 저녁을 기약하지 못할 만큼 곤궁했어도 친척과 옛 벗을 거두어 많은 것을 나누고 적은 것을 쪼개 주었으니, 의로운 행실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조조가 표를 올려 그를 불렀으나 왕랑은 곡아에서 강과 바다를 떠돌아 여러 해 만에야 이르렀습니다. 『한진춘추』는 건안 3년(198) 조조가 그를 부르자 손책이 보냈다 하고, 조조가 손책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왕랑이 「손책은 용맹이 한 세상에 으뜸이고 큰 뜻이 있으며, 장소가 재상이 되고 주유가 장수가 되었으니 끝내 천하의 큰 도적이 될 것」이라 답했다고 적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에게 공융은 어서 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간의대부로 사공 조조의 군사에 참여했습니다.
건안 18년(213) 위나라가 처음 서자 군좨주로 위군태수를 겸했고, 소부 · 봉상 · 대리를 거쳤습니다. 옥사를 다스릴 때 너그럽게 하기를 힘쓰고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했으니, 법을 밝게 살펴 들어맞게 한 종요와 함께 옥사를 잘 다스린다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진군전은 조조가 육형을 되살리자는 의논을 붙였을 때 진군 · 종요는 찬성했으나 왕랑과 여러 사람은 아직 할 수 없다고 했다고 적습니다.
연강 원년(220) 조비가 위왕이 되자 어사대부가 되어 안릉정후에 봉해졌고, 백성을 기르고 형벌을 살피라는 상소를 올려 옥사를 바로 하고 장정이 농사에 힘을 다하게 하며 늙은이와 아이를 돌보면 「열 해 뒤에는 비녀 꽂은 처녀가 골목에 가득하고, 스무 해 뒤에는 싸울 만한 장정이 들판을 메울 것」이라 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헌제전』은 선양 때 상국 화흠 · 태위 가후 · 어사대부 왕랑이 구경과 함께 조비에게 제위를 받으라고 아뢰었다고 적습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공이 되어 낙평향후로 옮겨 봉해졌습니다. 조비가 사냥을 자주 나가 어두운 밤에 돌아오자 제왕의 경계를 어긴 것이라 간해, 조비는 밤에 돌아오는 일을 고치게 했습니다. 오와 함께 촉을 치자는 의논에는 천자의 군사는 산처럼 움직이지 않다가 때를 보아 움직여야 한다며 말렸습니다.
황초 4년(223) 홀로 도를 지키는 군자를 천거하라는 조서에 광록대부 양표를 천거하고 병을 핑계로 자리를 넘기려 했으나, 조비는 양표에게 삼공 다음 자리를 주고 왕랑을 붙들었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제갈량집』은 같은 해 사공 왕랑이 사도 화흠 · 상서령 진군 등과 함께 촉의 제갈량에게 글을 보내 천명과 사람의 일을 늘어놓으며 온 나라를 들어 번국이 되라고 권했으나, 제갈량은 답하지 않고 「정의」를 지었다고 적습니다. 이듬해 손권이 아들 손등을 볼모로 보내지 않아 조비가 동쪽을 치려 하자, 왕랑은 장수들에게 지키게 하고 안으로 농사를 넓히라고 했습니다.
황초 7년(226) 조예가 즉위하자 난릉후로 올려 봉해졌습니다. 업에 가서 문소황후의 능을 살피고 온 그는 백성이 넉넉지 못한데 궁궐을 짓는다며, 우 임금과 구천, 한 문제 · 경제의 검소함을 들어 꼭 필요한 전각만 갖추고 나머지는 풍년을 기다리며 농사에 힘쓰라고 상소했고, 곧 사도가 되었습니다. 태화 연간에 종요가 육형을 되살리자고 하자, 육형을 다시 쓴다는 소문이 먼저 적국에 퍼져 먼 곳 사람을 불러들이는 데 이롭지 않다며 사형에서 한 등급을 덜자고 했고, 백여 명의 의논이 대부분 그를 따랐습니다. 『역』 · 『춘추』 · 『효경』 · 『주관』의 전과 상주 · 의논을 지어 세상에 남겼습니다. 『위서』는 그가 재주가 높고 박식하며 엄정하고 강개했고, 공손하고 검약해 혼인 때 친척의 예물도 받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태화 2년(228) 11월 왕랑이 죽자 시호를 성후라 했습니다. 아들 왕숙이 뒤를 이었고, 앞서 조비가 그의 봉읍을 나누어 아들 하나를 열후로 봉하려 하자 왕랑은 형의 아들 왕상을 봉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왕숙의 딸은 사마소에게 시집가 진 무제 사마염을 낳은 문명황후이니, 왕랑은 사마염의 외증조부가 됩니다. 『진서』는 그 이름을 원희라 적습니다. 정시 4년(243) 왕랑은 태조의 사당 뜰에 배향되었습니다. 진수는 「왕랑은 글이 넓고 넉넉했다」고 평했습니다.
鍾繇開達理幹,華歆清純德素,王朗文博富贍,誠皆一時之俊偉也十年之後,旣笄者必盈巷。二十年之後,勝兵者必滿野矣『삼국연의』 제15회 · 제56회 · 제79~80회 · 제91회 · 제93회
연의에서 왕랑은 제15회에 회계태수로 처음 나옵니다. 손책에게 쫓긴 오군의 엄백호를 구하려 하자 군리 우번이 「손책은 인의의 군사이고 엄백호는 포악한 무리이니 엄백호를 사로잡아 손책에게 바치라」고 말리지만, 왕랑은 노해 꾸짖고 엄백호와 함께 산음의 들에 진을 칩니다. 이미 오군을 얻고도 우리 땅까지 삼키려 하느냐며 손책을 꾸짖은 왕랑은 몸소 칼을 휘둘러 태사자와 맞붙지만, 주유와 정보가 뒤를 치자 성으로 들어가 지킵니다. 손정의 꾀로 손책이 군량을 쌓아 둔 사독으로 가는 척하자, 뒤쫓아 나간 주흔은 손책의 창에 죽고 엄백호는 달아나며, 왕랑은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닷가로 달아납니다.
제56회에서는 동작대 잔치에서 종요 · 왕찬 · 진림과 함께 시를 바치는 문관으로 이름이 나옵니다. 제79회에서 조비가 위왕이 되자 어사대부가 되고, 화흠 · 이복 · 허지 등 마흔여 명과 함께 헌제에게 선양을 아뢰러 들어갑니다. 제80회에서는 예부터 흥하면 반드시 망하는 법이니 한의 기수가 다했다며 헌제에게 물러나라 하고, 화흠에게 눈짓해 용포를 붙잡게 하며, 조비가 사양하는 표를 짓습니다. 조비가 황제가 되자 사공이 되고, 제91회에서 조예가 즉위하자 사도가 됩니다. 이때 사마의가 모반한다는 방이 붙자 일찍 없애야 한다고 아뢰고, 싸움을 겪어 본 적 없는 하후무에게 대군을 맡기는 것도 말립니다.
제93회에서 하후무가 세 군을 잃자 조진을 대도독으로 천거하고, 자신도 일흔여섯의 나이로 군사가 되어 따라나섭니다. 한마디 말로 제갈량의 항복을 받겠다며 기산 앞 진에 나선 왕랑은 천명이 위에 있으니 항복하라고 달래지만, 제갈량이 동해 바닷가에서 효렴으로 벼슬에 나아가 한을 도와야 할 자가 도리어 역적을 도와 찬탈을 꾀했다며 「흰머리 필부, 푸른 수염의 늙은 도적」이라 꾸짖자, 가슴에 노기가 차 크게 소리치고 말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연의에서 왕랑이 나오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아들 왕숙 · 조카 왕상 · 손자 왕순 · 왕개 · 손녀 왕원희(사마소의 아내)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노부가 한마디 하겠소.
노부가 한마디 하겠소. 천명을 아시오?
허튼 말은 삼가시오. 조정의 법도가 있소.
…숨이 가쁘구려.
이 나이에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천명은 이미 정해졌소. 순리를 따르시오.
…이 늙은 것이, 이 늙은 것이!
노부의 말이 옳지 않소?
…노부가 또 흔들리는구려.
…늙은 것이, 늙은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