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대(子臺) · 미상 ~ 미상 (213년 이후) · 서주 낭야국 · 원술 휘하
손책의 꾐에 상료로 나갔다가 환성을 잃은 원술의 여강태수
출전 · 『삼국지』 오서 손책전과 배송지 주의 『강표전』 · 위서 유엽전 · 사마지전과 배송지 주의 『위략』 · 무제기와 배송지 주의 『위서』 · 문제기 배송지 주의 『전론』 · 원술전 · 오서 종실전 · 주유전 · 『후한서』 원술전
유훈은 자가 자대이며 낭야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따로 세운 전이 없고, 『삼국지』 손책전과 유엽전, 사마지전에 인용된 『위략』 등에 기록이 흩어져 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그는 중평 말에 패국 건평현의 장이 되었고, 조조와는 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원술은 손책에게 여강태수 육강을 치게 하며 이기면 여강을 주겠다고 했으나, 성이 떨어지자 옛 부하 유훈을 태수로 삼았고 손책은 더욱 실망했습니다. 유엽전에 따르면 양주의 사나운 우두머리 정보를 벤 유엽이 그 무리를 유훈에게 넘겼는데, 유훈이 까닭을 묻자 유엽은 법도 없이 노략질로 살아온 무리라 오래 거느리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이때 유훈의 군사는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 강했습니다.
건안 4년(199)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과 대장 장훈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손책에게 가려 했으나, 유훈이 길목에서 쳐서 모두 사로잡고 보물을 거두어 돌아갔습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강표전』은 원술의 사촌 아우 원윤과 사위 황의 등이 조조가 두려워 수춘을 지키지 못하고 원술의 영구와 처자, 부곡을 이끌고 환성의 유훈에게 왔다고 적습니다. 군량이 모자란 유훈은 사촌 아우 유해를 예장태수 화흠에게 보내 곡식을 구했습니다. 화흠이 해혼 상료의 종수들에게 쌀을 내게 했으나 한 달이 넘도록 몇천 섬밖에 모이지 않자, 유해는 유훈에게 상료를 치라고 알렸습니다.
손책은 강해진 유훈을 미워했습니다. 유엽전에 따르면 손책은 몸을 낮춘 편지와 넉넉한 예물을 보내 「상료의 종민이 여러 해 우리를 업신여겼으나 길이 불편해 치지 못하니, 큰 나라가 쳐 주면 밖에서 돕겠다」고 했고, 손책전은 손책이 거짓으로 맹약을 맺고 상료를 치라 권했다고 적습니다. 진주와 갈포까지 받은 유훈이 기뻐하자 안팎이 모두 축하했으나 유엽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엽은 「상료는 작아도 성이 굳고 해자가 깊어 열흘 안에 떨어뜨릴 수 없으니, 군사가 밖에서 지치는 사이 손책이 빈 곳을 치면 나아가도 물러나도 갈 곳이 없다」고 말렸으나 유훈은 듣지 않았습니다.
『강표전』에 따르면 유훈은 몰래 해혼으로 군사를 냈으나 종수들이 진영을 비우고 숨어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황조를 치러 가던 손책은 석성에서 이를 듣고 사촌 형 손분 · 손보에게 8천을 주어 팽택에서 기다리게 하고, 몸소 주유와 함께 2만을 이끌고 환성을 쳐 떨어뜨렸습니다. 원술의 장인들과 고취 부곡 3만여 명, 원술과 유훈의 처자가 모두 손책에게 넘어갔습니다. 팽택에서 손분 · 손보에게 진 유훈은 심양을 거쳐 서새로 가서 기에 보루를 쌓고, 유표에게 급함을 알리며 강하태수 황조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황조가 맏아들 황사에게 배 군사 5천을 주어 보냈으나 손책이 다시 쳐서 크게 깨뜨렸고 황사도 달아났으며, 유훈은 유해와 함께 북쪽으로 조조에게 갔습니다. 손책전은 그가 거느린 수백 명만 데리고 갔다고 하고, 무제기는 여강태수 유훈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열후에 봉해졌다고 적습니다.
조조 밑에서 그는 평로장군 화향후가 되었고, 건안 18년(213) 조조에게 위공의 자리를 권한 신하들 가운데 이름이 보입니다. 조비는 『전론』에서 평로장군 유훈, 분위장군 등전 등과 술을 마시다가 사탕수수를 칼 삼아 등전과 겨루었다고 적습니다. 『위략』은 그가 조조와의 옛 사귐을 믿고 날로 교만해져 여러 번 법을 어기고 남을 헐뜯다가 이신성의 고발로 잡혀 다스림을 받았고, 형이 예주자사로 있다 병으로 죽은 뒤 그 뒤를 이었던 조카 유위도 벼슬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사마지전에 따르면 그의 빈객과 자제가 광평에서 여러 번 법을 어기자 그는 이름도 적지 않은 편지로 광평령 사마지에게 청탁했으나, 사마지는 답하지 않고 모두 법대로 처리했습니다. 유훈은 뒤에 법도를 벗어난 일을 꾀했다 하여 죽임을 당했고 그와 오가던 이들도 모두 죄를 입었으나, 사마지는 이 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上繚雖小,城堅池深,攻難守易,不可旬日而舉勛自恃與太祖有宿,日骄慢,數犯法,又誹謗『삼국연의』 제29회
연의에서 유훈의 이름은 제29회 첫머리에 한 번 나옵니다. 강동을 차지해 군사가 날래고 군량이 넉넉해진 손책이 건안 4년 여강을 기습해 빼앗고 유훈을 깨뜨린 뒤, 우번을 시켜 예장에 격문을 띄우자 예장태수 화흠이 항복했다고 적습니다. 이어 손책의 기세를 들은 조조가 「사자 새끼와는 칼끝을 다투기 어렵다」고 탄식하며 조인의 딸을 손책의 막내아우 손광에게 주어 혼인을 맺었다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손책이 유훈을 꾀어낸 일과 유엽의 간언, 황조에게 구원을 청한 일은 연의에 없습니다. 또 제21회는 원술이 죽자 조카 원윤이 영구와 처자를 데리고 여강으로 가다 서구에게 모두 죽었다고 그려, 원술의 처자가 유훈에게 몸을 맡긴 일도 나오지 않습니다. 연의에서 유훈이 나오는 것은 이 한 줄뿐입니다.
역사 연대표에서 이 사람이 서는 일입니다. 딱지는 그 일이 정사와 연의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뜻합니다.
형(예주자사) · 형의 아들 유위 · 사촌 아우 유해
이 무장이 게임 안에서 실제로 하는 말입니다.
여강태수 유훈이오. 무리는 넉넉하오.
여강의 군사는 강과 회수 사이에서 으뜸이오. 말로 밀어 보시오.
말은 달콤하나 예물은 더 달콤하오. 그대는 무엇을 내놓겠소?
…상료는 작아도 성이 굳다던 그 말이 이제야 들리오.
성을 비우라는 편지였구려. 내가 귀를 막았던 것이오.
꾀는 그대의 것이었으나 성은 아직 내 것이오.
빈 성을 두고 나간 값이구려. 북쪽으로나 가야겠소.
원술의 무리가 다 내 손에 들었소.
환성이 떨어졌다니… 서새로 물러나오.
옛정만 믿은 것이… 내 탓이오.